“그리는 게 아니라 언제 붓을 던지느냐가 중요”

문광스님
문광스님

➲ 부처님이 골라준 고택(古宅)

장욱진(張旭鎭, 1917~1990, 사진)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이 있겠냐마는 나는 특히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 경기도 성남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다가 글이 막힐 때면 차를 몰고 용인 마북의 장욱진 고택으로 달려가곤 했다.

1884년에 지어져서 ‘광서(光緖)’ 연호가 남아 있는 이 한옥에서 장 화백은 총 700여 편 가운데 200여 편의 작품을 마지막 5년 동안 쏟아내었다. 그는 “이 공간이 곧 내 화폭이다”라고 할 정도로 이 집에서 왕성한 예술혼을 불태우고 갔다. 

내가 장욱진 고택을 자주 찾았던 이유는 그의 치열했던 정신세계와 접속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이곳이 풍수적으로 명당이어서 사랑채의 쪽마루에 한동안 앉아 참선을 하다 보면 정신이 맑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힘 있는 용맥이 주산으로 내려와 주고 좌청룡과 우백호가 잘 감싸준 곳이었는데 압권은 평온하고 예쁘게 펼쳐진 눈앞의 안산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관람객도 없어서 추녀 끝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한참을 사색에 잠겨 있다 보면 막힌 글의 실마리를 잡아갈 수도 있었다. 누구든지 이러한 집에 살게 되면 집중력이 배가되고 왕성한 기운을 받을 수 있다. 뒤편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개발의 광풍이 몰아쳐서 자칫 사라질 뻔했던 위기도 있었지만 화가의 가족들이 이 고택을 용케도 잘 지켜냈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 문화재로 등록되어 누구든지 발길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장욱진은 덕소(1963~1974), 명륜동(1975~1979), 수안보(1980~1985) 등의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작품활동을 해 왔는데, “돌아다니면서 고른 집은 없어. 모두 우연히 된 거지. 부처님이 해 놓으시면 어정어정 들어가 살았어”라고 했다. 그는 복이 많은 화가였고 철저한 불자로 살았다.
 

장욱진
장욱진

➲ 캔버스 위의 한국화

장욱진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와 함께 2세대 서양화가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그는 서구화가 가장 강력하게 밀려오고 추상화가 전성시대를 맞이했던 근현대의 한국화단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가장 잘 지켜내며 독자적인 화풍을 구현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의 그림은 한국인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부담 없는 순수하고 소박한 조형미를 남겨주었는데 그의 화풍은 캔버스 위의 민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욱진의 화폭에 등장하는 까치, 집, 가족, 나무, 해, 달, 산은 우리가 늘 보아왔던 우리나라 시골의 정감어린 자연 풍경이다. 티 없는 동심의 ‘선경(善境)’과 욕심 없는 탈속의 ‘선경(仙境)’, 그리고 간략한 선(線)과 단순화된 터치로 펼쳐진 ‘선경(禪境)’은 “나는 심플하다”로 대표되는 그의 화론(畵論)에 걸맞은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드는 그의 그림들의 매력은 화가 내면의 순수성과 소탈함에서 기인한 것으로 천진불(天眞佛)의 여래성기(如來性起) 그 자체였다. 

그는 10호 이내의 소품들을 그리면서도 다작을 하지 않았고, 작은 그림도 2~3개월 동안 다듬으며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사인을 하지 않았다. 마치 동양화를 그리는 듯 방바닥에 펼쳐놓고 쪼그리고 앉아 그리게 된 것도 ‘친절하고 치밀한 작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생긴 습관이었다. 그의 그림에는 나무 위에 집이 올라가 있기도 하고 원근법을 전혀 무시하기도 하는 등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선정의 세계가 엿보인다. 
 

‘신갈집’이라고 불렀던 경기도 용인 마북의 고택 쪽마루에 앉아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장욱진의 모습(1986년). 사진=중앙포토
‘신갈집’이라고 불렀던 경기도 용인 마북의 고택 쪽마루에 앉아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장욱진의 모습(1986년). 사진=중앙포토

➲ 언제 붓을 던질 것인가?

장욱진은 7년(1954~1960) 동안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하다가 그마저도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그만두었다. 그는 돈과 명예에는 별 관심이 없는 속진의 때를 벗은 사람이었다. 교수 시절 그는 제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자기 그림은 자기가 그려야지 그림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간혹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제자가 있으면 어깨를 툭툭 쳐서 불러내어 막걸리를 사 주었다고 한다. 같이 술을 먹다가 제자에게 다시 영감이 떠오르면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가 서양화가를 꿈꾸는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하나 남기게 된다. “서양화는 그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 붓을 던질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서양화는 특성상 끊임없이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데, 이때 욕심을 버리고 적당한 순간에 마음을 내려놓고 붓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자로서 평생 갈고닦은 선지(禪旨)를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작가 내면의 수련과 직관의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의 교수생활이었으나 당시 그에게 매료된 제자들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초 세배를 왔다고 한다. 장 화백은 격식보다 소탈을 좋아했고 겸손보다 교만이 낫다고 했다. 겸손은 오히려 교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격적인 선승의 법어와도 같은 통찰들이 그의 심플한 언어 곳곳에 번득이고 있다. 
 

고택 뒤의 원두막 같은 정자 관어당(觀魚堂) 모습.
고택 뒤의 원두막 같은 정자 관어당(觀魚堂) 모습.

➲ 주선(酒禪)의 임종화(臨終畵)

장욱진은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림을 위해 심신을 남김없이 써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일이고 술은 휴식이었다. “취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술은 그에게 어쩌면 세간에서 벗어나 무심의 경지에서 노니는 선정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일평생 일삼은 것은 그림과 술밖에 없었다는 기인(奇人) 장욱진에게 술은 ‘주선(酒禪)’의 행위 같은 것이었다.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스님을 만나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그는 “까치를 좀 잘 그립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여 주었더니 스님은 비어있는데 비어있지만은 않다며 비공(非空)이라는 불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경봉스님도 그의 그림에서 선미(禪味)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죽기 사흘 전에 마지막 유작인 <밤과 노인>을 그렸다. 이는 선사들이 마지막에 남기는 임종게(臨終偈)와 같은 임종화(臨終畵)였다. 이 작품을 보고 아버지의 죽음을 직감한 자녀들이 눈물을 보여도 그는 태연자약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고 한다. 평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했던 그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유유히 하늘로 날아가는 자화상을 그린 것이다.

정자에서 다리를 뻗고 있는 자신을 그린 <도인(道人)>의 수염 달린 사내가 까치 대신 승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그림 속에 등장하는 어린 남자 아이는 백혈병으로 15세에 먼저 떠난 막둥이 아들로 추정된다. 남겨진 1남4녀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아버지가 나를 가장 사랑했다고 기억한다고 하니 화가의 남다른 가족사랑에 따스함이 느껴진다.
 

장욱진 화백의 소탈한 모습을 담은 작품 ‘도인(道人, 1985)’.
장욱진 화백의 소탈한 모습을 담은 작품 ‘도인(道人, 1985)’.
죽기 사흘 전에 그린 ‘밤과 노인(1990)’.
죽기 사흘 전에 그린 ‘밤과 노인(1990)’.
‘진진묘(眞眞妙, 1970)’는 부인 이순경 여사의 불명으로 아내의 초상화를 보살상으로 그린 것이다.
‘진진묘(眞眞妙, 1970)’는 부인 이순경 여사의 불명으로 아내의 초상화를 보살상으로 그린 것이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 1976’에는 유일하게 그림의 제목과 화가의 사인이 아닌 이름을 기입하여 부처님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 1976’에는 유일하게 그림의 제목과 화가의 사인이 아닌 이름을 기입하여 부처님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 걸작 너머 보이는 더 큰 그림

장욱진은 17세 때 열병을 앓아 수덕사에서 6개월간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만공선사는 그를 출가시키려 하다가 그림 그리는 것도 스님들 공부와 똑같은 공부라고 하면서 장가만 잘 가면 재밌게 살 것이라 했다고 한다. 

장 화백은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복예(福藝)가 구족(具足)된 인물이었다. 일본으로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가난 속에서 요절한 동료 화가 이중섭과는 달리 그는 역사학자 이병도의 장녀 이순경을 아내로 맞아 평생을 예술에만 전념하며 살 수 있었다. 처복이 만복의 근원이라 했던가. 술주정뱅이 남편의 술의 힘에 맞서 부인은 <금강경>을 매일 7독씩 하며 불교의 힘으로 이를 버텨냈다고 한다.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이 한갓 사람을 모시지도 못하면서 어찌 큰 부처님을 모실 수 있겠냐”고 했단다.

기도하는 부인을 보고 영감을 얻은 화가는 겨울 아침 덕소 화실로 가서 1주일 만에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 와서 흡족해 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진진묘(眞眞妙)>이다. 이 그림에 모든 정열을 쏟은 화가는 3개월간 병이 나서 몸져 누웠다고 한다.

지금도 혜화동 로터리에는 아내 진진묘 보살님이 가정살림을 유지하기 위해 1954년부터 운영했던 ‘동양서림’이라는 책방이 문을 열고 있다. 30여 년간 식구처럼 함께 해온 지배인의 가족들이 이어서 운영을 하고 있으며 서울시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장욱진 화백의 뒤에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티내지 않고 살아온 보살마하살이 한 분 계셨다. 이처럼 위대한 한국인의 뒤에는 반드시 그보다 더 위대한 어머니와 지혜로운 부인이 숨어 있다. 우리네 집안에는 이러한 달관과 초탈의 보살님이 한 분쯤 다 그렇게 계셔서 우리를 지켜주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은 낙산 골방에서 나와 혜화로터리에 있는 동양서림에 한번 들를까 한다. 장욱진 화백의 위대한 그림 너머로 더 큰 그림을 보여준 올해 101세를 맞이한 진진묘 보살님, 틀림없이 그분의 향취가 그 공간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불교신문3615호/2020년9월19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