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48> 마포 석불사(石佛寺)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48> 마포 석불사(石佛寺)
  •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20.09.17 22:16
  • 호수 3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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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부처님 한강 굽어보는 300년 가람

환성대사가 숙종 때 창건
한강 오가던 뱃사공 지켜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찰
땅에 묻힌 석불 다시 모셔
도심 사찰로 법등 이어져

“그들은 조반을 먹고 나서 경강 저자에 관해 더 애기를 나누었다. 대용과 대두 석서방은 나룻배를 타고 마포 동막거리의 강주인을 찾아가 사금파리 어음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성대가 나룻배를 저어 그들은 한강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올라갔다. 과연 경강의 마포인지라 사설 창고들이 강변에 즐비하였고, 각종 시전에 나온 가가들이 열을 지어 늘어섰는데 여각과 객주의 크고 작은 집채들이 촘촘하였으며 색주가와 주막과 간이 술청이 용수 씌운 장대며 발 달린 등이며를 펄럭이면서 늘어서 있었다.”
 

서울 마포 석불사에서 바라보는 한강, 그 뒤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서울 마포 석불사에서 바라보는 한강, 그 뒤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전국에서 가장 번잡했던 마포나루

황석영이 쓴 장편소설 <장길산>에 나오는 대목이다. 시끌벅적한 마포나루 풍경이다. 마포나루는 지금의 서울 마포구 마포동 한강 강안에 있던 나루터였다. 강원도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서 실려 온 목재, 삼남 지방의 곡식, 서해 뱃길을 따라 올라온 새우젓 등 온갖 물산이 이곳에 모였다.

강 건너 여의도는 땅콩 밭이 즐비한 백사장이었고 영등포로 이어져 시흥을 거쳐 남으로 내려가는 1번 국도길이다. 마포나루에서 부린 물산은 공덕동을 지나고 아현고개 만리재를 넘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아래 용산강과 위쪽 양화진이 마포나루를 함께 이뤄, 혹은 마포(麻浦)의 마(麻)를 우리말로 불러 삼개나루라고도 했다. 

한강은 한반도의 심장이다. 강을 따라 전라 경상 충청 강원도 등 내륙에서 중국 상선이 서해를 건너 한강을 따라 들어온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육로는 운반 가능한 물품과 인력 이동이 한정적이지만 수로는 대규모 운송이 가능하다. 한강의 다섯 포구 중에서도 마포나루가 가장 붐볐다. 

한강을 누빈 운송기관은 황포돛대였다. 마포나루 앞 밤섬에는 조선 최고의 선박기술자들이 집결한 조선소가 있었다. 1894~1897년 네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을 방문한 기록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조선에서는 소금을 비롯한 많은 물품이 한강에서 배를 통해 포구로 운반되고 포구의 상인들은 소나 말, 지게 등을 이용해서 도시의 장터로 옮긴다”고 기록했다. 조선 말 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 수가 하루 평균 100척이었다고 하니 전국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드나들고 물건이 오가는 조선 최고 최대 시장이요 거리였다. 

전국 각지에서 이름도 성도 얼굴도 다르지만 마음은 한결 같았으리라. 무사히 강을 건너 물건을 넘기고 많은 돈을 벌어 가족을 배불리 먹이는 중생들의 한결같은 염원 그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중생의 염원도 서려 있으니 부처님께서 이들을 지켰다. 

마포나루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 부처님이 나투시어 뱃사공을 지켰다. 숙종(1674~1720년) 때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년)대사가 지금의 석불사 터에 창건한 미타암(彌陀庵)이다. 한강을 진호(珍護)하고 상인과 선원들의 무사 항해와 상업 번창을 기원하는 수륙재를 올리는 호국사찰이었다. 사공과 상인들은 인자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부처님을 보며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기쁨에 감사하고, 멀리 삼남으로 떠나며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했을 것이다. 

핍박받던 조선시대를 넘겨 부처님의 청정 정법이 살아 숨쉬기까지 많은 승재가의 공헌이 있었다. 법등이 희미해지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고승이 등장했으니,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던 시기의 허응당 보우대사, 중기의 청허휴정대사, 후기의 환성지안대사다. 모두 성리학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유교 경전에 해박하고 선(禪)과 교(敎)를 겸비하고 수행력이 출중한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다. 왕실과 관리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신망도 깊었으니, 조선을 지배하던 유생들 입장에서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다.
 

석불사 정문 풍경.
석불사 정문 풍경.

수륙대재 봉행하던 호국사찰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 후기 쇠퇴일로의 조선불교를 뛰어난 교학과 수행력으로 법등을 일으킨 환성지안대사는 부처님처럼 평생 전국을 행각하며 교화를 펼쳤다. 삼남과 강원도 함경도 등 북부에 이르기까지 대사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포나루터에 대사가 미타암을 세운 연유를 짐작하고도 남는 대목이다. 

1725년(영조1) 김제 금산사에서 열린 화엄대법회에 1400여 대중이 몰릴 정도로 백성들의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대사는 그 인기 때문에 결국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제주로 귀향가 그 일주일 뒤 좌탈입망한다. 100년 전 보우 대사를 제주에 귀향 보내 무참히 참살한 그 업보를 되풀이 했으니 비통한 일이다. 

대사가 그렇게 억울하게 떠났는데 미타암이 무사할 리 없다. 흥선대원군이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염원하는 절을 부수고 음풍농월하는 풍월정(風月亭) 정자를 세웠다. 왕조가 바람 앞에 등불 인데도 먹고 사는 민생과 백성들 안위 보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풍월에 더 마음을 둔 셈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형상이 없어졌다고 염원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강화에서 온 도사공 우대용, 그를 속인 악덕 물상객주 강주인, 상인들 뒤를 봐주고 돈을 뜯는 왈짜 홍천수, 강원도에서 목재를 싣고 온 나무꾼, 황포돛대를 만든 기술공, 뱃사공, 관리들, 짐을 무사히 받을 때까지 가슴 졸였을 객주들 수많은 사람들의 애절한 염원은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다.
 

한강을 바라보는 석불사 미륵불.
한강을 바라보는 석불사 미륵불.

무진거사 천일스님으로 이어져 

그래서 대사가 입적하고 절이 정자로 바뀌고 수십 년이 지날 무렵 불심이 돈독한 김해 김씨 무진거사(無盡居士)를 통해 미타암은 다시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다. 무진거사는 청룡이 승천하는 꿈에서 본 한강변으로 달려가 석불을 발견한다. 이 곳이 절터임을 알고 중창 불사(佛事)를 펼쳐 석불암(石佛庵)으로 이름을 바꾸고 딸 일광화(日光華), 월광화(月光華) 자매로 하여금 절을 지키고 불공을 올리도록 하였다. 

김무상화 전정월화 등 신심 깊은 불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 사찰을 지켰다. 법등은 월광화의 딸로 동진출가한 천일(天日, 1912~1977년)스님에게 이어졌다. 스님은 각고의 노력을 펼쳐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큰 비구니 사찰로 면모를 일신했으며 6·25전쟁으로 삼성각을 빼고 모두 전소하여 퇴락한 사찰을 다시 일으켰다. 천일스님의 뒤를 이어 상좌인 법진 법수 법선 법인 법운스님이 또 역사를 만들었다. 

1990년 당시 주지 법운스님이 대대적으로 일으키고 2004년 부임한 경륜스님으로 이어지는 20년에 걸친 불사가 완성됐다. 그리하여 대웅전 극락전 요사 강당 등 1000여평의 대지 위에 1000여평의 건평을 자랑하는 가람으로 성장했다. 

석불사가 자리한 마포동 일대는 한강을 정비하고 1970년 다리가 놓이면서 나루터 역할도 끝났지만 지금도 서울 도심으로 향하는 교통 요지며 서울의 관문이다. 김포국제공항에 내린 외국 원수가 도열한 서울 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광화문으로 들어가던 길목이었으며, 1984년 한강 홍수 피해 이재민을 돕는 북한 적십자 구호 물품이 들어오던 길도, 여의도 광장에서 출발한 제등행렬이 지나가던 곳도 이 곳이었다. 지금도 인천 파주 고양 강남 등 각지로 떠나는 지하철과 택시를 타려는 취객이 가장 붐비는 교통 요지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사실상 서울 도심의 끝이었으니 전차 종점이 이 곳에 있었던 이유다. 
 

옛 마포나루 모습.
옛 마포나루 모습.

지역주민들의 자랑

석불사 역시 과거 한강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강변 사찰에서 이제는 지역민들과 함께 하며 정법을 펼치는 지역 거점 도량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3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석불사는 서울 도심 속 한강변에 자리 잡고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실로 유서 깊은 비구니(比丘尼) 사찰입니다”라는 사찰에 걸린 안내문처럼 석불사는 온가족이 함께 법회를 보고 수행을 하며 봉사하는 고향과 같은 사찰이다. 

관내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잔치를 열고 독거노인을 돌보며 불우이웃을 돕는 한편 늘 기도하고 수행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청정도량이다. 주민자치위원장을 맡아 어려운 사람을 돕고 마을을 위해 일한 주지스님의 이력에서 보듯 석불사가 이 지역 터줏대감이며 호법신장이다. 그 옛날 뱃사공, 객주, 주막 아낙이 의지했던 것처럼 석불사는 지역민들의 귀의처다. 

9월9일 석불사 대웅전 앞에 서서 한강을 바라보았다. 절 정문 양 옆에 서있는 빌딩 사이로 한강이 흘러간다. 그 뒤로 국회의사당이 머리를 내밀었다. 미륵대불 눈이 그곳으로 향해 있다. 국민들 심부름꾼이라는 그들이 미륵부처님께서 국민들을 위해 진정으로 일하는 지 지켜 보고 있음을 알고 있는 지 궁금해졌다. 

한강도 마포도 과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지만 중생의 염원을 안고 자비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영원하다. 석불사도 그러하다.
 

석불사 역사관에서 만나는 석불 모습.
석불사 역사관에서 만나는 석불 모습.

[불교신문3614호/2020년9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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