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건
과거 잡느라 버둥거린 우리 탓

혜인스님
혜인스님

귓가에 남지 않는 말이었음 좋겠다. 눈에 남지 않는 몸짓이었으면, 마음에 남지 않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남김없이 이 순간 다 보내고 다음 순간을 온전히 맞을 수 있도록. 아픔이고 슬픔이고 행복이고, 거기에 쏟아낸 노력이고 뭐고 간에. 호랑이 가죽과 사람의 이름은 할 수 없는, 죽어서도 남는 것 하나 없는, 그래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온전히 맞을 수 있는 그런 삶이었음 좋겠다.

요즘 강아지들과 바위봉우리에 오르는 재미에 빠졌다. 이른 아침 산길의 고요함을 틈타 아무도 밟지 않은 오늘의 첫 땅을 딛는 설렘. 산길을 따라 마음도 고요해지는 사이 내딛는 걸음마다 나는 땅을 만난다. 발밑으로 널 만나는 일이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며칠 안 됐지만 금새 친해진 땅이 내 발을 힘차게 밀어 올린다.

정상엔 물안개가 자욱해 사방이 희뿌옇다. 안개를 맞아 온몸에 맺힌 땀방울과 가빠진 숨보다, 몇 배는 더 거칠어진 강아지들 숨소리와 길게 늘어뜨려 축축해진 혀를 보며 덕분에 한숨 더 쉬어가야지 하고 여유를 얻는다.

바람이 분다. 정상의 바람은 ‘휘익’이 아니라 ‘부웅’ 하고 분다. 부웅 바람이 물안개를 밀어내 시야를 틔워주는 사이, 바람이 싣고 간 땀방울 덕에 한결 가벼워지는 몸. 어느 시인을 키웠다는 8할의 바람은 어느 발명가를 키운 99%의 땀이었는지도. 우리를 애써 키워온 땀방울을 싣고 날아간 바람은 이미 저만치로 가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바람은 알고 있다. 지금의 우리를 키워낸 땀들을.

내가 하는 법문도 오래 귓가에 맴돌 때가 있다. 내가 쓴 글도, 내가 뱉은 말도, 내가 일으킨 마음도 내 안에 오래 남을 때가 있다. 그치만 여운이 오래 남는 일이 그리 반갑지 않은 건, 이 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만큼 다음 순간과 친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게 나도 모르게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말한다. 죽으면 알아서 사라질 과거를 뭐하러 애써 붙잡고 있느냐고. 기어코 죽고 나서야 놓아버릴 작정이냐고. 흉악한 무기징역수도 죽음에 이르는 순간 더 이상 누구도 그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고. 죽어서 바람이 되어보면 알게 될 일이라며, 바람은 아쉬워도 않는다. 아쉬워하는 건 언제나 과거를 붙잡고 사는 우리지.

그래서 바람은 늘 8할 정도만 분다. 역대급 태풍도 이 할 정도는 여유를 두고 비껴가듯이. 바람이 마음먹고 99%의 땀을 다 쏟았으면 우린 이미 다 날아가 버리고 없을 거다.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남기고 부는 게 바람의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일 테지.

그치만 아쉬움도 바람을 잡을 순 없단 걸. 네가 날, 내가 널, 내가 나를 끝내 붙잡을 수 없단 걸 바람은 알고 있다. 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건 결국 잡을 수 없는 과거를 잡느라 버둥거리는 우리 탓이란 걸 바람은 이미 알고 있다.

덕분에 가벼워진 몸을 일으켜, 올라오며 디뎠던 첫 번째 땅을 다시 딛고 내려간다. 이번엔 땅이 말한다. 아까 그 땅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없다고. 그러니 다시 딛는 이 땅도 언제나 첫걸음일 뿐이라고. 땅은 그렇게 처음처럼 힘차게 내 발을 밀어 올린다. 산길이 고요해진 아침을 틈타 땅과 바람과 이렇게 친해진다.

바람아. 네 8할을 타고 난 2할 정도만 치는 그저 그런 타자가 돼볼게.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있도록. 네가 내 땀방울을 싣고 간 덕에 난 다시 8할 만큼만 더 땀 흘려 볼게. 그렇게 이 순간 무엇도 남기지 않고 날아가 볼게. 너는 좋겠다. 이미 알고 있어서. 이미 날고 있어서.

[불교신문3613호/2020년9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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