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의 비결? ‘불교대학’과 ‘일요법회’부터

삼국시대에 세워진 천년고찰
원효대사 ‘해골물’ 역사의 현장
주지 도윤스님 부임 이후
지역내 대표 포교도량 ‘일신’

충남 당진에 위치한 영랑사. 이름은 생소하지만 숨어있는 천년고찰이다. 서기 564년에 세워졌다는 설이 있고 648년에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영랑사의 시간은 장구한 시간이다. ‘영랑이란 사찰의 이름도 유래가 둘로 나뉜다. 알다시피 당진은 서해와 마주한 고장이다. 예전에는 절 앞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다고 한다. 해수에 반사된 절의 그림자에서 착안해 영랑(影浪)’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절이 얹힌 산의 이름도 영파산(影波山)이다.
 

지난 6월말 영랑사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철야정진을 하는 모습.
지난 6월말 영랑사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철야정진을 하는 모습.

또 하나의 가설은 역사가 깊다. 중국 당태종의 막내딸이었던 영랑공주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본디 해동(海東, 한반도)에 자신의 원찰(願刹)을 짓고 싶어 했다. 마침 신라가 당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서기 660년 백제를 정복하면서 기회를 얻었다. 백제 영토였던 당진에 당나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고 그녀는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당나라 수군(水軍)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우리 입장에선 패배와 핍박의 민족사를 확인해주는 유적이란 점에서 씁쓸할 수 있다. 지난 봄철,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의 유입과 창궐로 한국과 중국 사이가 껄끄러워졌었다. 영랑사는 사대(事大) 아니면 항전을 지난하게 거듭해온 한중관계의 양면적인 이면도 보여준다. 아무튼 당나라도 영랑공주도 신라도 백제도 사라졌지만, 영랑사만은 여전히 건재하다. 템플스테이 운영도량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든 고즈넉한 풍경을 선물하는 한국인들의 쉼터로 완연하게 자리 잡았다.
 

영랑사 불교대학 강의 현장.
영랑사 불교대학 강의 현장.

영랑이란 이름에 얽힌 마지막 가설은 불교적이다. <금강경>의 핵심 글귀인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의 뜻을 빌었다. 곧 세상만사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는 제행무상의 이치를 가르쳐주는 절이다. 한국사의 위대한 도인 원효대사의 흔적이 묻어있기에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해골 물전설을 남긴 원효대사의 당나라 유학은 유명하다. 해로를 통해 당나라로 떠나려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 수군의 주둔지였던 당진을 찾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랑사가 선 땅은 원효와 관련해 익히 알려져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잠결에 무덤가에 뒹굴던 해골 속의 썩은 물을 맛있게 들이켜고 난 아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통렬하게 깨달았다는 곳이다. 후세에 고려 태조 왕건이 이를 기리고 알리려고 940년에 영랑사를 지었다는 것이 마지막 가설이다.

이렇듯 원효스님의 오도(悟道)와 밀접하게 얽힌 영랑사는 당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당진 주민들의 애환을 조용히 보듬어온 절이다. 특히 2019년 신임 주지로 도윤스님이 부임하면서 포교도량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고 있다.

주지 도윤스님에 따르면 영랑사는 조용하고 아늑한 절이었으나 그만큼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절이었다. 이제는 시골의 외딴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이면 200명 가까이 모인다. 웬만한 도시의 중협급 이상 사찰이 부럽지 않다. 템플스테이까지 운영하면서 바람만 불던 사찰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201812월 주지로 부임했으니 고작 1년 반 만에 거둔 성과다.

포교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의외로 매우 단순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불교대학을 만드는 것이다. 주지로 온 뒤 3개월을 준비해 불교대학을 열었다. 스님은 몇 년 전만 해도 당진에는 법회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법회를 하더라도 스님의 법문은 없이 신도들은 기도와 정근만 하다 떠났다. 함께 모여 경전을 읽고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다 보니 신심이 생기고 유대감이 생겼다.
 

고즈넉한 영랑사 전경.

물론 절은 술집이나 클럽이 아니다. 말초적인 재미가 없으니 사람들은 절대 그냥은 찾아오지 않는다. 스님은 이곳저곳 현수막을 걸고 지역 주간지에 2년 동안 광고를 내는 정성을 보였다. 어느덧 남의 흉이나 보던 입이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토론했다. 불교대학 졸업생들이 배출되면 자연스럽게 영랑사와 불교를 위해 일하는 불자들로 성장했다.

불교대학이 성장하니 구경도 못하던 신도회가 열심히 활동하게 됐다. “주지가 진심으로 움직이면 반드시 신도들이 진심으로 움직이고 주지를 믿고 따라가게 됩니다. 사찰이 화합하고 번창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지요.” “불자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이유는 바로 주지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지적은 탈종교화와 불자 감소 시대에 울리는 바가 크다.

또 하나의 단순한 포교비법은 일요법회. 초하루법회 대신 일요법회를 개설하고 활성화하니 10명 남짓이던 법회 참석 인원이 두 달 만에 60명으로 늘었다. 지난주에는 폭우를 뚫고 40명이나 와서 감동했다. 관행을깨는 작은 시도만으로도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법회의 다양화를 꾀했다. 수요일 기도로 배우는 법회 목요일 가족들을 위한 법회 목요일 경전을 배우는 법회 토요일 새 신도 교육(불교입문) 일요일 몸과 마음이 좋아지는 참선 염불 법회도 인기가 좋다. 매월 한 차례 철야정진으로 심신을 맑히는 것도 영랑사의 아름다운 밤 풍경이다. 이처럼 산중의 고찰에서 기운찬 전법도량으로 급격하게 그 입지가 변화하고 있는 영랑사다.

 

인터뷰 | 영랑사 주지 도윤스님

오늘은 무슨 기쁨을 드릴까요?”

도윤스님
도윤스님

도윤스님은 1999년 조계종 전 총무원장 법장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번 생은 오직 포교를 위해 살겠다는 원을 세웠다. 현재 덕숭총림 수덕사 포교국장 소임도 맡고 있다. 서울 화계사 포교국장 시절엔 국립의료원과 국립재활원에서 환자들을 부처님 품으로 이끌었다. 당진시불교사암연합회장으로서 지역불교를 선도하고 있기도 하다.

영랑사의 빠른 성장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포교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이다. 물론 포교는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대단한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게 포교라며 지역민들을 늘 공경하고 하심하며 신뢰를 싹틔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밝혔다시피 스님은 불교대학 개설로 영랑사를 일취월장시켰다. 불교대학이 필요한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었다.

사람들이 이해관계로만 사는 것 같지만 마음 한구석엔 항상 정서적인 목마름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불교대학에서 배우다 보면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감동하게 됩니다. 단순히 특정종교를 믿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보람과 긍지로 가슴이 벅찹니다. 불교대학을 충실히 마치면 사찰의 대소사를 거드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합니다. 불교 일을 하면서 불교의 권익을 앞장서서 옹호하는 신도로 거듭납니다. 신도회도 자연스럽게 결성되는 것이죠. 이들이 불교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아주고 음해에도 당당하게 맞섭니다.” 불교 신행의 근간인 신해행증(信解行證)을 시작하고 완성하는 공간이 바로 불교대학인 셈이다.

스님은 향후 10년 안에 영랑사를 충남의 대표적인 포교도량으로 일신하겠다는 대원(大願)을 세웠다. 불교대학 10기생을 배출하면 300명이 될 것이다. 이들과 함께 하면 두려울 것도 어려울 일도 없다는 확신이다. 그러기 위해선 포교에 목숨을 걸겠다는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님의 뒤편에 걸린 액자의 글귀가 인상적이다. ‘오늘은 무슨 기쁨을 줄까.

당진=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이시영 충청지사장 lsy@ibulgyo.com

[불교신문3613호/2020년9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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