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전할 수 없는 묘한 도리

“물소리 모두 부처님 설법이고 산빛 모두 부처님 청정법신이요, 밤새들은 8만4000 법문 후대인들에게 어찌 전할까.” 동파(東坡) 오도송은 절창이다. 무정설법의 가르침 한방에 문자와 알음알이는 녹아버렸다. 사람의 모든 일은 만남으로 결정된다. 동파는 유교사상을 근간으로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다. 스스로 전생에 승려(僧侶)였다고 했으며 옥천사 승호, 동림사 상총 선사의 가르침에 큰 깨달음을 받았으며 거사 불교의 큰 맥이다. 

“계율로부터 시작하여 정(定)과 혜(慧)를 정밀하게 하고 심원에 증거하며 깨달음의 묘경에서 그 극에 도달하는 것으로 입이나 손으로 전 할 바가 아니다“라는 동질적 관념 속에 형상 이상의 정신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서법(書法)은 불법(佛法)과 같다고 주창하였다.

작품을 거칠게 걸어가는 듯 행운유수의 붓질로 담아 휘호한 것은 동파 도인의 삶을 담아놓고 싶었다. “이르는 곳마다 그 오묘함은 얻었지만 입으로 전할 수 없다.” 이 시는 서호 풍경을 읊은 구절이지만 심오한 불법의 가르침 같기에 염화시중의 도리라 할까, 구경(究境)에 이른 최상승의 깊이와 맛은 깊고 깊어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도 알 수 없는 것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관계성이다.

글씨 속에 붓(筆)이 있음은 마치 선가(禪家)의 글귀 속에 눈이 있는 것 같다. 모름지기 이러한 눈을 갖추어야 사물을 이해 할 수 있다. 서예와 선불교의 심미관은 둘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오래전 관람한 소동파의 기념관(중국 항주)에서 본 서예 작품은 단아했다. 추사는 동파가 정신적 스승이었기에 보소재(寶蘇齋)라는 당호를 쓰면서 보배스러운 선생으로 모시고 사셨으며, 낙관 글씨에 생신을 맞아 썼다라고 쓰고 있다. 스승을 모시려면 이렇게 모셔야 한다.

복이 많아 불국사승가대학에서 서예수업을 몇 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덕 높은 스님이라는 신분에 글씨 쓰는 실기보다 서도의 심미성과 수행과의 관련성, 사찰 현판과 주련의 격(格)에 대해서 실기보다 이론적인 수업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냈다. 무척 행복했고 저의 많은 강의 중에 큰 의미로 남을 일이었다. 

서예와 불교가 지금은 동떨어진 관계가 되어버린 현실이 많이 아쉬울 뿐이지만 불교와 가장 가까운 색이 먹물 색이고, 부처님의 ‘묵빈대처’ 하라는 말씀이 진한 먹물을 듬뿍 머금은 붓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복의 색상도 먹물색인 것이 우연이 아니다. 먹색은 동양정신의 색상이며 불법과 서법이 둘이 아니다. 

[불교신문3612호/2020년9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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