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동국사 · 불교신문 공동기획’
인도 설화 지닌 아름다운 ‘53불’


기존에 나온 흑백 사진과
불상위치 좌대방석 ‘달라’
미군 폭격에 유점사 전소

근대자료를 다수 보관하고 있는 군산 동국사(주지 종걸스님, 시립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장)와 불교신문(사장 정호스님)은 동국사가 소장하고 있는 근대불교사료를 지면과 인터넷을 통해 연속 보도한다. 
 

칼라 사진으로는 처음 공개되는 금강산 유점사 53불. 사진제공=군산 동국사
칼라 사진으로는 처음 공개되는 금강산 유점사 53불. 사진=군산 동국사

고구려 제2대 유리왕 13년(서기 4년)에 창건됐다는 설화를 간직한 금강산 유점사를 대표하는 53불(佛)의 모습을 담은 칼라 사진이 공개됐다.

군산 동국사가 공개한 53불 칼라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것으로, 본지가 지난 2009년 2월(2503호) 보도한 흑백사진과 달리 선명한 색감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위치나 좌대방석(천)의 모습도 다르다. 사진 왼쪽에는 일본어, 아래쪽에는 영어로 ‘조선 내금강 유점사 53불’이라는 제목과 함께 간단한 설명이 인쇄되어 있다.

고려시대 전중시사(殿中侍史)와 수정승(守政丞) 등을 지낸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은 기문(記文)에는 “부처님이 열반한 후 인도 사위성의 사람들이 금으로 53불상을 조성해 유연국토(有緣國土)에 갈 것을 발원하며 배워 태워 띄어 보냈는데, 월지국(月支國)을 거쳐 안창현(安昌縣, 강원도 고성)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09년 2월 불교신문을 통해 공개된 유점사 53불 흑백사진. 1924년 발간 '일만이천봉 조선 금강산'에 실린 것이다.
2009년 2월 불교신문을 통해 공개된 유점사 53불 흑백사진. 1924년 발간 '일만이천봉 조선 금강산'에 실린 것이다.

유점사 53불이 근대에 알려진 것은 1912년 금강산 불교유적으로 조사하던 동경제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에 의해서다. 그는 1917년과 1920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유점사 능인보전(能仁寶殿)에 봉안되어 있는 53불을 소개하면서 ‘기적적인 대발견’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간에 노출된 53불은 이후 일본인과 도적의 마수에 시달렸다. 수차례 약탈, 도난, 환수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으며 일부는 없어지고 말았다.

1924년 9월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금강유기(金剛遊記)’에는 유점사 53불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53불 가운데 44불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도난당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다.

“친절한 지도로 능인전(能仁殿)에 들어가니 대소(大小) 각양의 금불(金佛)이 참차만전(參差彎展)한 유지(楡枝, 느릅나무 가지) 우에 보기 조케 안자 잇는데 금불이라하야 절취(竊取)하야 가는 자가 만흔 ᄯᅢ문에 좌대(座臺)를 전부 철사망(鐵絲網)으로 싸서 잇고 현존한 것은 53불 중에서 4개뿐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유점사 53불 사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유점사 53불 사진.

높이가 약 7~41cm로 다양한 유점사 53불은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 법문을 듣고 구법(求法)하는 과정에서 친견한 53선지식을 상징한다. 유점사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불타 53불의 행방은 묘연에 지고 말았다. 폭격으로 전소됐다는 설과 북한군이 평양으로 사전에 옮겼다는 설이 교차하고 있다.

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은 “선조들이 전해준 아름다운 문화유산의 생생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라면서 “이번 공개를 계기로 어딘가 남아있을지 모를 유점사 53불의 일부라도 다시 모실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군산=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3612호/2020년9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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