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 약사여래 찾아 치병·국가재난 극복

8세기 신라에 약사신앙 유행
전염병과 기근 가뭄 이겨내려
간절한 염원으로 약사불상 조성

경덕왕 조성 분황사 약사불상
청동 30만6700근 사용한 大佛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
조형적 주조기술적으로 뛰어나

석조약사불상은 좌상형식 조성
결가부좌 하고 오른손 촉지인
왼손바닥에 약기 올려놓은 모습
통일신라인 창안한 것으로 추정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후, 일부 스님들은 무의(巫醫, 무당)를 대신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였다. 미추왕(味鄒王, 262~284) 때 성국(成國)공주의 병을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고쳐 주었고, 눌지왕(訥祗王, 417~457) 때 왕녀의 병을 묵호자(墨胡子)가 향을 피워 완쾌시킨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스님들의 치병 행위는 <약사경>이 전래되고 약사신앙이 유행하던 7세기에도 계속되었는데, 원광(圓光)스님은 진평왕(眞平王, 579~632)의 병을 치료하였고, 자장(慈藏, 638년 입당 643년 귀국)은 당나라 유학 중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였으며, 밀본(密本)은 637년(선덕여왕 5)에 선덕여왕의 병을 고쳤다.
 

석조약사불좌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3.32m, 국립중앙박물관.
석조약사불좌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3.32m, 국립중앙박물관.

밀본은 치병의 방법으로 <약사경>을 염송하였는데, 아마 약사경전 류인 <관정경(灌頂經)>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에 앞서 진평왕 후기(620~630)에 김양도(金良圖)의 병을 고칠 때도 약사경을 사용하였는데, <삼국유사>에는 그가 경(經)을 읽기도 전에 사방(四方)에서 대력신(大力神, 藥師十二神將)이 나타나 김양도의 병을 일으킨 귀신들을 잡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7세기 전반에 신라 왕실에서 <약사경> 염송을 통한 약사신앙이 유행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한편 당나라 유학승 혜통(惠通)이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 등 밀교 경전의 주문(呪文)을 외워 신문왕(神文王)과 공주(효소왕의 딸)의 병을 고쳤다는 기록도 있어서 경전 염송을 통한 치병 행위가 통일신라시대 초기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전 염송과 밀교적인 치병 행위는 692년에 국가의료기관인 의학(醫學)이 설치되고 전문적인 의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왕실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8세기 이후, <약사경>에 대한 교학적인 이해가 깊어지면서 약사신앙이 크게 유행한다. 700년경, 현전하지는 않으나 경흥(憬興)과 둔륜(遁倫)스님은 각각 <약사경소(藥師經疏)>를 찬술하였으며, 태현(太賢, 大賢)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의 주석서인 <본원약사경고적(本願藥師經古迹)>을 저술하였다. 경주 남산 봉화곡의 칠불암(七佛庵)에서 발견된 약사석경(藥師石經) 잔편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을 돌에 새긴 것이다.

태현스님의 <본원약사경고적>과 칠불암의 약사석경은 8세기 중엽 신라의 약사신앙이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에 교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 때의 약사신앙은 치병(전염병) 외에 가뭄과 기근 등 국가적인 재난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실제로 경덕왕(景德王) 대인 8세기 중엽에 기근, 가뭄, 전염병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심각하였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확인되어 주목된다. 

8세기 중엽, 국가적인 재난을 약사신앙을 통해 극복해 보려는 의지는 약사불상 조성으로 이어졌다. 755년(경덕왕 14), 본피부(本彼部)의 장인 강고내말(强古乃末)이 30만6700근(斤)을 들여 주조한 분황사(芬皇寺) 청동약사불입상은 대표적인 예이다. 불상에 사용된 청동의 무게를 황룡사(黃龍寺) 장육존상(丈六尊像)에 들어간 청동 양(3만5007근)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압도적인 크기였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가 있다.

당시에 조성된 분황사 청동약사불입상은 조선시대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 때 소실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으나 왕실 발원 불상으로서 최고의 수준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상종 승려인 진표(眞表)가 8세기 중엽에 부친과 함께 금강산(金剛山) 발연수(鉢淵藪)에서 주조하였다는 금동약사불입상의 기록도 당시 약사불상의 조성이 얼마나 유행하였는지를 잘 알려 준다.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 1.77m, 국립경주박물관.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 1.77m, 국립경주박물관.

1930년경, 경주 소금강산(小金剛山) 중턱의 백률사(栢栗寺) 대웅전에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온 금동약사불입상은 당시에 활발했던 약사불상 조성의 분위기를 잘 전해 준다. 분황사 청동약사불입상을 연상하게 하는 이 불상은 광배와 대좌가 없어졌으나 조형적으로나 주조기술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을 갖추고 있어서 최고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상에는 주조할 때 사용된 33개의 형지(型持, 안 틀과 바깥 틀을 고정하는 것)가 몸 전체에 걸쳐 남아 있으며, 뒷면에는 안 틀(주조틀)과 바깥 틀을 연결하던 4개의 장방형 틀잡이 구멍이 있다. 또한 조성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도금 흔적과 조선시대에 입혔던 채색이 곳곳에 남아 있다.

불상은 내의와 띠매듭이 표현된 법의를 통견 방식으로 입고 있으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 설법인을 결한 것으로 보이며, 왼손은 허리 쪽에서 약간 앞으로 내민 채 약기(藥器)를 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숭고한 종교성이 느껴지는 원만한 상호와 팔등신에 가까운 늘씬한 몸을 갖추고 있으나 형식적이고 간략화된 법의 주름과 몸의 굴곡을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양감이 줄어든 조형을 통하여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분황사와 백률사의 금동약사불입상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미국 보스톤미술관 소장의 금동약사불입상에서 볼 수 있듯이 8세기 후반에 조성된 소형의 금동약사불입상의 모델이 되었다. 이들 금동약사불입상은 분황사와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과 함께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의 칠약사여래(七藥師如來)를 모델로 하였기 때문에 입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형의 금동약사불입상들은 대부분 왼손은 허리까지 들어 올려 앞으로 살짝 내민 채 약기를 바쳐 들고 있으나, 오른손은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즉 오른손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뜨리거나 아니면 가슴 옆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을 편 채 앞으로 내보이거나 엄지와 다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이들 금동약사불입상은 왼손에 약기를 든 당나라 약사불입상과 닮은 것은 사실이지만,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과 같은 대형상을 조성한 예가 당나라 불상 중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금동약사불입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29.6cm,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약사불입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29.6cm,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약사불입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36.0cm, 보스톤미술관.
금동약사불입상,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36.0cm, 보스톤미술관.

금동제 약사불상이 대부분 입상 형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 석조약사불상은 주로 좌상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석조약사불좌상은 8세기 전반부터 인도(印度)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정각상(正覺像)을 모델로 하여 조성된 촉지인 불좌상이 경주를 중심으로 유행하면서 오른손은 촉지인을 하고, 왼손은 손바닥 위에 약기를 올려놓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들 촉지인 석조약사불좌상 중에서 “藥師佛(약사불)”이라는 명문이 확인된 예는 없지만, 8세기 중엽 이후의 신앙적인 분위기는 이들 불상이 약사불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촉지인 석조약사불좌상은 경주 남산에서 특히 많이 조성되었는데, 원래 냉골(三陵溪)에 있었던 석조약사불좌상(현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중에서도 대표적인 예이다. 

일제강점기 때, 경주 남산에서 서울로 옮겨온 석조약사불좌상은 불신, 광배, 대좌를 따로 만든 다음 조합하였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촉지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는데, 왼손 손바닥 위에는 약기로 보이는 둥글 물체가 표현되어 있다. 불상은 장방형의 얼굴과 당당한 상체를 갖추고 있으며, 가슴과 무릎은 두꺼운 편이다.

얼굴은 앞면보다 옆면이 넓은 편이며, 머리 뒷면의 둥글게 처리된 머리카락은 정돈되지 않은 채 목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불상은 낮고 편평한 육계, 부풀어 오른 듯한 눈두덩과 양 볼, 두 개의 선으로 표현된 눈썹, 살짝 힘이 들어간 입술을 갖추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서 정강이 위까지 수직으로 내려와 예리한 각을 이루며 바깥쪽으로 꺾여 올라간 법의 자락은 경주 남산 냉골의 석조불좌상과 남산 용장골의 용장사지 석조불좌상에서도 확인되어 남산에서 활동하던 같은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법의 자락은 왼쪽 어깨 뒤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어깨 측면을 살짝 걸치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광배에는 화염문과 줄기까지 표현된 연잎, 6존의 화불이 새겨져 있다.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팔각연화대좌의 중대 면석에는 장방형 안상(眼象)과 그 속에 향로와 공양자 등이 표현되어 있다. 대좌 하대에 비해 상대의 폭이 좁으며, 그로 인해 불상의 양 무릎이 대좌 밖으로 살짝 나와 있다. 

불상은 석굴암 주존 불상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8세기 후반의 남산 석조약사불좌상들과는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석굴암 주존 불상과 그 영향을 받은 불상에서 공통점으로 나타나는 편단우견 방식의 착의법과 양 발목 사이의 부채꼴의 법의 주름이 불상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석굴암 주존 불상의 영향이 경주 남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8세기 중엽에 불상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촉지인 불좌상에 영향을 준 당나라 불상 중에는 왼손에 약기가 표현된 약사불좌상이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아 이 도상이 통일신라 사람들에 의해 창안되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추측하게 한다.

[불교신문3610호/2020년9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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