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처럼 살다 간 서예 대가

몇 년 전이었다. 살면서 기쁜 일이 어찌 한 두 가지 이겠냐마는 작품을 인연으로 일어나는 일이 가끔 있다. 글씨 한번 봐 달라는 부탁을 받는 일은 큰 복이고 기쁨이다. 오래 전부터 공부에 도움을 주시는 스님께서 액자 한 점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다. 

신선 같은 삶을 사시다 작고하신 서예 대가의 맑은 행서와 초서 필의(筆意)로 맛깔나게 삶처럼 선명하게 선기(禪氣) 넘치게 휘호(揮毫)된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는 작품이었다. 청허휴정 서산대사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낙관만 있어 언제 쓴 글씨인가 알 수는 없지만 화선지의 색상 변화와 표구 틀의 변색으로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다. 나의 작업실에 걸어두고 한동안 맑은 기운을 얻어 마시다 아끼고 싶은 마음으로 예쁜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한 작품을 만나는 일은 인생 전부를 만나는 위대한 사건이며, 그를 통해 무언의 대화를 나누면서 차를 나누기도 한다. 좋은 작품은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만나는 일대사이기에 참으로 가슴 뛰는 일이다. 다시 걸어놓고 안복(眼福) 이라도 해야겠다.

‘홍로일점설’ 백화도인 서산대사의 친필이며 어떻게 쓰셨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사념과 망상, 모든 것 털어버린 파르르한 붓질일 것이라 생각하니 온몸이 파리해지고 맑아진다. 좋은 작품은 사람을 깨우고 말없는 가르침으로 이끈다. 부처님 말씀 한 점 걸어놓고 념(念)하면 집안에 선한 가풍이 되고 삶이 바뀐다. 

한더위 속에 ‘홍로일점설’ 작품 끌어안고 한세월 망념 내려놓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작품도 언제쯤 누군가를 절대경지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좋은 글씨는 세간살이 치유이며 선지식이다. 큰스님의 가르침과 선기(禪氣) 품은 작품, ‘홍로일점설’ 일구(一句)는 형상문자 밖에 있음을 알아야한다. 

큰스님 말씀 여름밤에 청량한 구미산(龜尾山) 바람같이 포근하고 따스하다. 

[불교신문3610호/2020년9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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