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어른 시봉하며 얻은 경전엔 없는 참 가르침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되는 어른이라지만 모두가 같은 어른은 아니다. 어른에게는 그에 맞는 직분이 있고 무거운 책임이 있다. 인품과 덕성으로 대중을 아우를 줄 알아야 하고 깊이 또한 지녀야 한다. 후학은 그런 어른의 말 한마디와 행동거지 하나에서 경전 보다 더 큰 것을 얻곤 한다. 그래서 어른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조계종 호계원장 무상스님은 노스님 향봉스님과 은사 성호스님에게서 산 보다 더 큰 어른의 모습을 보았고, 출가수행자의 길을 배웠다.

유난히 산불이 잦았던 해인사는 학인들의 체력을 키우기 위해 축구를 시켰다. 앞줄 가운데 당시 해인사강원 강주 보광스님을 중심으로 축구복을 입은 학인들의 모습이다. 무상스님은 뒷줄 오른쪽 두 번째에 있다.
유난히 산불이 잦았던 해인사는 학인들의 체력을 키우기 위해 축구를 시켰다. 앞줄 가운데 당시 해인사강원 강주 보광스님을 중심으로 축구복을 입은 학인들의 모습이다. 무상스님은 뒷줄 오른쪽 두 번째에 있다.

 

#1

호계원장 무상스님의 출가사찰은 많은 이들이 송광사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해인사다.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사미계를 받았고, 해인사 강원에서 수학했다. 해인사에서 연을 맺은 은사 성호스님의 재적본사를 따라 송광사에 승적을 두게 됐다.

행자생활을 마치고 은사를 정하는 시기, 무상스님은 당시 총무로 있던 성호스님에게 은사가 되어줄 것을 청했다. “난 상좌 안둔다며 쫓겨 나왔다. 알고보니 강원 선배 중에도 성호스님에게 거절당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무상스님은 은사를 정해야하는 마지막 날까지 고집을 부렸다. 계를 못받는 한이 있어도 성호스님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떼를 썼다. 마감시간이 임박해서야 성호스님은 무상(無想)이란 법명을 내렸다. 그렇게 맏상좌가 됐다.

합천 연호사로 자리를 옮긴 은사 성호스님에게 인사를 갔다. 은사 스님은 5만원을 내밀며 용채로 쓰라고 했다. 무상스님은 강원에서 서기 소임을 살아 적게나마 나오는 금전이 있고 학인이라 돈 쓸데가 없다며 거절했다. 은사 스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돈이 썩어나서 주는 것이 아니다. 공금에 손대지 말라고 주는 것이다.” 무상스님은 살아있는 가르침에 감동했다. 지금도 은사 스님의 생생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2

무상스님의 노사는 향봉스님이다. 효봉스님과 함께 송광사를 일군 큰어른이다. 무상스님은 한철 향봉스님을 시봉했다. 노스님 바로 옆방이었다. 당시 여든살 즈음이었던 노스님은 새벽 도량석이 시작되는 올림목탁 소리에 시자방에 불이 켜지지 않으면 문짝을 부술 기세로 호통을 쳤다. “이놈의 자식, 목탁 귀가 그렇게 어두워서 중노릇 어떻게 하냐며 혼쭐이 났다.

한철에 불과했지만 노스님을 곁에서 시봉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당시 송광사 방장은 구산스님이었다. 향봉스님의 숙질이었고 연배도 낮았다. 심부름으로 산문 밖을 다녀와 노스님에게 인사 드리려 하면 방장 스님 인사는 드렸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이 놈아, 산중의 어른은 방장이다. 먼저 인사드리고 와라하고는 물렸다.

방장실에 가면 구산스님은 노스님에게 인사 드렸냐?”고 묻고는 먼저 인사 드리라고 돌려보내려 했다. 노스님이 방장실로 먼저 보냈다고 답하면, 구산스님은 그래도 어른은 노스님이다. 그리 알아라하면서 얼른 인사하고 노스님께 인사드리라고 했다.

구산스님은 법문을 자주 다녔다. 법문비를 받아오면 송광사 살림에 보태라고 종무소로 보내곤 했다. 구산스님은 산문을 드나들면 먼저 향봉스님과 취봉스님이 있는 인경당으로 왔다. 먼저 향봉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어디를 다녀왔고, 이번 나들이는 어땠다고 일렀다. 다음은 취봉스님에게 들러 똑같이 했다. 취봉스님은 효봉스님과 향봉스님을 송광사로 모신 원래 송광사 문중의 큰어른이다. 그런 다음에야 방장실로 올라갔다. 무상스님은 승가의 참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다.

#3

무상스님은 갖고 있는 옛 사진이 없다.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간수하질 못했다. 강원 도반인 만불사 회주 학성스님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보내준 옛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해인사 강원 시절, 축구경기 후 찍은 사진이다. 강주 보광스님과 당시 학인이었던 현강(전 법주사 강주), 승원(전 총무원 기획실장), 정안(전 총무원 호법부장), 정수(전 봉선사 주지), 보원(전 중앙종회의원)스님 등과 함께 찍었다. 학인들은 부잡스러웠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쳤다. 그러나 티없이 순수하고 맑았다.

1977년 경반 때의 일이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해인사에 들른다는 전갈이 왔다. 사중에서 방장 성철스님에게 연통을 보냈다. 대통령이 뵙고 싶어하니 내려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성철스님은 내려오지 않았다. 전국의 큰스님들이 해인사로 모이던 날은 백련암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담소를 나누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강원 졸업 직후 첫 안거를 해인사 선원에서 났다. 유나 도견스님의 일로 대중공사가 붙었다. 오후불식을 잘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됐다. 선방이 어수선했다. 방장 성철스님이 장군죽비를 어깨에 걸치고 선방에 나타났다. “유나가 어떻다고 하는데 내 앞에서 한마디 일러봐라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음날 성철스님이 또 선방에 들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1시간 함께 정진을 하고 난 뒤 더이상 할 말이 없는걸로 알고 난 올라간다하고는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무상스님이 본 큰스님의 진면목이다.

하남=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611호/2020년9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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