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정성으로 조상 모시면 복 … 화 입는 경우 없어

조상 푸대접하겠다는 결심하고
각오 세우는 후손 모습 서글퍼

절에서 지내는 제사와 차례는
추모 이상의 ‘천도’ 의미 함축
스님들과 정성껏 장엄염불하면
복을 지어 받는 의미도 담겨

“스님, 저희 며느리가 제사 지내기 싫다고 해서 교회에 나가려고 합니다. 제가 진작 포교를 했어야 하는데, 때를 놓쳤습니다. 스님, 제 상식으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스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런 얘기를 심심찮게 듣습니다. 요즘 젊은 며느리들이 제사 때문에 불평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도들에게, “결혼하기 전에, ‘불교를 믿겠다. 그리고 불교대학에 다니겠다’라는 각서를 며느리로부터 받으세요. 그리고 아들 내외가 불교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보고 결혼시키세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조상을 무시하는 차원을 넘어 푸대접하겠다며 제사를 지내지 않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사진은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에 비치된 신도 조상들의 위패.
조상을 무시하는 차원을 넘어 푸대접하겠다며 제사를 지내지 않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사진은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에 비치된 신도 조상들의 위패.

불자라면 제사는 으레 잘 지내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신도님은 스스로 말하듯이 기회를 놓쳤습니다. 제사를 지내기가 싫어서, 시부모님이 믿는 불교를 버리고 교회를 가겠다니 참으로 기가 찬 일입니다. 우리들끼리 하는 얘기지만, 이건 정말 사람으로서는 할 짓이 아닙니다. 소가 다 웃을 일입니다. 

요즘 와서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조상을 무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조상을 푸대접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각오를 세우니 참으로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과연 자기가 낳은 애들, 후손이 잘될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조상 없는 후손이 없는 법인데, 이렇게까지 하다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자기 가문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아주 필요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제사의식입니다. 그런데, ‘며느리들이 왜 제사 지내는 것을 힘들게 생각하는가?’ 제가 몇몇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니 음식 장만이 장난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절에다가 제사를 모실 것을 권유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주 간단한 방법이라고 좋아합니다. 가족들이 절에 와서 제사에 동참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음식 장만 등의 수고로움이 일체 없으므로 제사 문제로 왈가왈부할 핑계는 없어집니다. 제삿날 절에 와서 향 올리며 잔 한 잔 치는데 어려울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참석하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그로 인해 가족들이 절에 오게 되므로 포교 차원에서도 좋은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에서라도, 돌아가신 분 덕분에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얼굴 한번 볼 수 있다면 차선책이지만 괜찮은 방법입니다.

또한 제사와 비슷한 것이 설, 추석의 차례입니다. 차례를 지내기 싫어서 불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간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설, 추석의 차례도 이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에서 하는 합동차례에 동참하면 모든 게 끝입니다. 어쩌면 불협화음이 있는 차례는 당연히 절에서 지내야 할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가족 구성원들의 종교가 각각 다른 경우에는 차례로 인한 부작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절 올리는 문제, 의식하는 절차 등이 종교마다 다른 경우가 많으니 이 또한 예사 문제가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절에서 차례를 올리면, 일단은 의례이므로 시비 거는 사람도 없을 테고, 차례가 끝나면 가족 각자가 자유로이 볼 일을 보기가 쉽습니다. 

절에서 차례를 지내면 좋은 점이 또 있습니다. 먼저 간 이들 중에서 챙기고 싶은 영가가 있었지만 가족 구성원의 눈치 때문에 할 수가 없었던 경우가 그러합니다. 절에서의 차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태중 사망 영가인 수자령 영가가 특히 그러합니다. 또한 가까이 지냈던 친구 영가, 촌수가 좀 먼 친척들의 영가를 챙길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한편 제사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한 방편이 있으니, 그것은 평생 위패, 즉 영구 위패 제도입니다. 영구 위패란 다니는 절에 위패를 한 번 올리면 100년 또는 무기한으로 그 영가를 챙겨드리는 위패입니다. 영구 위패를 올린 영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찰에서 별도의 비용 없이 설, 추석의 합동차례를 지내드리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일이 돌아오면 망축(亡祝) 카드를 뽑아서 왕생극락 축원을 해드립니다.

저희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에는 이러한 혜택 때문인지 많은 분들이 영구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수천의 위패가 보기에도 장엄스럽지만, 영구 위패를 모신 분들 스스로 하나같이 안도하면서, 신도로서 원찰에 대한 더욱 확고한 신심을 내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 도인’이라고 알려져 있는 송담 대선사, 그 큰스님의 주석처인 인천 용화사에도 가보면 영구 위패가 법당 벽면 가득히 모셔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집에서 제사 또는 차례를 지내기가 힘든 경우, 그 때문에 가족들끼리 싸우지 말고 절에 모시면 됩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속가 집으로서는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가 제사를 다 맡고 있습니다. 고조부 고조모, 증조부 증조모, 조부 조모, 아버님 어머님, 이 여덟 분의 제사를 날짜 놓치지 않고 지내드립니다. 당연히 영구 위패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기일이 돌아오면, 가족들 친척들이 와서 잔 치고 경전도 읽습니다. 물론 재는, 스님이 염불하면서 주도합니다. 그리고 영구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설, 추석의 합동차례도 자동으로 모셔지게 됩니다. 

절에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게 되면 오히려 큰 장점이 있습니다. 집에서 지내게 되면 단순히 추모의 뜻만 있지만 절에서 지내게 되면 추모 이상의 천도의 의미가 들어갑니다. 스님들과 정성껏 장엄염불도 하고 <금강경>도 같이 읽어드리니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딴 몸을 받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조상이 있다면, 그 기회에 천도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절에서 지내는 제사, 차례에는 작복(作福)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영가가 인연 되어 공양도 올리고, 재물 보시에도 동참된 것이므로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에서 신도들이 정성껏 차례를 겸한 제사를 올리는 모습.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에서 신도들이 정성껏 차례를 겸한 제사를 올리는 모습.

이렇듯이 정성껏 제사, 차례를 지내면, 그 영가가 이미 윤회했다 할지라도 영적 에너지는 통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반드시 조상 영가에게 기도의 힘이 미칩니다. 그렇게 되면 선의 에너지는 다시 재자에게로 돌아와 음덕(蔭德)으로 남게 됩니다.

한 가지 부연해서 말씀드리면, 집에서 제사 또는 차례를 지낼 경우에는 절에서 의식을 행하듯이 반드시 <금강경> 또는 <반야심경>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사나 차례가 허례허식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불교식으로 해야 합니다. 불교식의 제사나 차례의 핵심은 경전독송에 있습니다. 집에서든 절에서든 영단에 앉아서 경전을 독송할 때는 정말 집중해서 정성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그 마음의 힘이 시공을 관통합니다. 

우리들이 지극정성으로 조상을 잘 모시면, 그것이 복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것이 절대 화가 된다거나 잘못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단언하건대, ‘제사, 차례 지내기 싫어서 교회나 성당 가겠다’고 한다면 그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혜의 눈이 밝지 못해서 보지 못할 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불교의례(佛敎儀禮)에는 불공의식(佛供儀式)과 재의식(齋儀式)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제사와 차례는 당연히 재의식입니다. 재의식은 저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구제(救濟)와 작복(作福)의 의미가 큽니다. 어쩌면 그보다도 보은(報恩)과 정업(淨業)의 의미가 더 클지도 모릅니다. 보은이란 은혜를 갚는다는 뜻인데, 제사와 차례의 재의식은 나 자신을 현재 존재하게 한 조상들에 대한 은혜를 갚는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업(淨業)이란 업을 정화한다는 말인데, 재의식을 함으로써 경전독송과 스님들의 법력을 통하여 돌아가신 분들의 업을 정화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인생 사이클을 중시했습니다. 그중에 죽음과 관계되는 상제(喪祭)는 불교에서 재의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는 윤회사상과도 잘 어울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든 불자들은 재의식이 이생에 남겨진 사람에게는 음덕이 되고, 먼저 가신 분들에게는 왕생극락의 기회가 됨을 분명히 인식해야겠습니다.  

* 이 글은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② 依土瓠差(의토호차)

토양에 따라 박 성장이 다르다

경북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짓던 사람이, 무슨 사정이 있어서 옆 동네 성산으로 이사를 가서 전과 같이 참외농사를 지었더니, 안 되더라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지난해에 스무 포기의 대박과 조롱박 모종을 구해서 도량 여기저기 심었는데, 위치에 따라 박 성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위치라고 말했지만 토양이라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무문관 안쪽의 터앝에 심은 박은 얼마나 잘 되는지 네댓 개의 대박과 수십 개의 조롱박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각 옆의 넝쿨 집에 심은 박은 대박과 조롱박 할 것 없이 모두 흉작이었습니다. 씨의 인(因)은 같되, 조건의 연(緣)이 다르니 결과(結果)가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그 연이란 토양이었습니다. 토양은 환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데도 이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빈말이 아닙니다. 요즘도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아이의 공부 성취도가 다른 것을 볼 때 환경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감포도량의 명물인 된장 간장도 그렇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환경이 크게 한몫을 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들이 참선하고 기도하는 공부의 텃밭도 그런 면에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어느 도량, 어느 선방에서 공부하느냐에 따라 성취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되는 선방, 되는 도량을 찾는 것은 공부의 가장 선결조건입니다. 

[불교신문3606호/2020년8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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