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이끌고 건너온 주지스님 432명 목숨 건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한강 범람 엄청난 희생

봉은사 주지 나청호스님
보상금 걸고 사람들 구해
공덕비 세워 은혜 기려

역대 최장 장마가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유례 없는 불볕 더위라는 기상 관측과 달리 햇볕 볼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7, 8월 여름은 비에 갇혔다. 피해도 막심하다. 급류에 사람과 가축이 휩쓸리고 토사에 매몰돼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연이 연일 언론을 장식했다. 서울은 한강 수위가 경계까지 차오르면서 주요 간선도로가 통제돼 며칠 동안 교통 체증을 앓았다. 좀체 물러나지 않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기진맥진한데다 장대비까지 겹쳐 고달픈 2020년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전경,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천년고찰 봉은사는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불교와 민족 국민을 위해 헌신해왔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전경,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천년고찰 봉은사는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불교와 민족 국민을 위해 헌신해왔다.

어머니와 같은 존재 

한반도 남북을 오가며 엄청난 비를 뿌려대는 장마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태풍이 휩쓸고 간 8월11일 서울 강남 봉은사도 비에 갇혔다. 사람과 돈이 가장 많이 몰린다는 강남을 대표하는 가람답게 봉은사(奉恩寺)는 대한민국 최고의 절이다. 연중 신도 발길이 끊이지 않고, 외국인 방문자도 많다. 스님들 독경소리, 신도들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비가 오는데도 많은 신도들이 전각에 들러 절하고 삼삼오오 모여 공부 중이었다. 입구부터 늘어선 연꽃과 경내 곳곳에 걸린 우란분절 백등(白燈)이 빛났다.

봉은사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늘 자신을 바쳐 한국불교에 헌신하고 이웃을 보살폈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초였다. 종단이 어려울 때, 나라가 원할 때, 지역과 이웃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무한정 베풀었다.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어떤 때는 종단도 나라도 가혹하리 만치 봉은사에 일방적 헌신을 요구했다. 그래도 묵묵히 돕고 또 도왔다. ‘받들고’ ‘은혜 갚는’(奉恩) 이름 그대로 봉은사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 부처님께서는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 독실한 우바이 문정왕후는 폐지된 승과고시를 다시 만들었다. 교종 수사찰 남양주 봉선사와 더불어 선종 수사찰로 조선 사찰을 이끌던 봉은사 앞 넓은 들에서 승과고시가 열렸다. 3년 마다 열리는 승과에서 장차 조선을 구할 두 명의 수행자가 나왔으니 1552년과 1562년에 합격한 휴정과 사명대사다.

스승과 제자는 30년 뒤 임진왜란을 맞아 승병을 일으켜 풍전등화에 처한 조선을 구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그 누가 뒷일을 알고 미리 대비했겠는가? 다만 불교를 숭상하고 수행자를 존중하면 반드시 그 공덕을 받는다는 진리를 입증한 셈이다. 

스님들의 헌신에 힘입어 나라를 건졌는데도 성리학자들은 봉은사를 아예 폐사하려들었으니 나라와 백성보다 문중과 일파만 챙기는 그들의 속 좁은 아량과 이익만 좇는 식견 탓이다. 도성에서 쫓겨나고, 부임지에서 죽임을 당하는 수난을 겪고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던 수행자의 무상행(無相行)과 비교하면 낯 뜨거운 처사다. 
 

봉은사 입구.
봉은사 입구.

봉은사 폐찰 기도했던 성리학자들

백곡처능 대사의 상소 덕에 봉은사가 폐찰을 면하고 살아남은 것은 이 땅의 백성들에게 천운이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가 지배하던 1925년 을축년(乙丑年), 공교롭게도 그 해도 올해처럼 윤사월(閏四月)이었다. 그 해 여름 조선 전역에 무려 네 번에 걸친 태풍이 들이닥쳐 물바다를 만들었다. 7월부터 9월 초 두 달여 동안 유례 없는 큰 비로 전국에서 647명의 사망자를 내고 수십만 채의 가옥과 논밭이 유실 붕괴 침수됐으며, 그 피해액이 1억300만원으로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 해 대만부근에서 발생한 태풍이 7월11일과 12일 중부지방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황해도 이남지방에 300~500㎜의 비를 뿌려 한강 금강 만경강 낙동강 등이 범람했다. 1차 피해를 수습하기도 전 인 7월16일부터 18일 까지 태풍으로 인한 비로 한강과 임진강이 범람했다. 당시 비로 18일 한강 인도교 수위가 11.66m를 기록했는데 한강대교 북단 다리 기둥에 최고 기록으로 적혀있다. 

올해 집중 호우로 올림픽대교, 강변북로 등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가 통제되고, 역대 최장의 장마일수를 기록하는 등 두 달 여간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도 아직 을축년 한강수위까지 도달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큰 물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는 홍수를 예방할 아무런 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인명구조나 방제 등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때이니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2차에 밀어닥친 비로 인해 영등포와 용산의 제방이 넘쳐 강변 일대 3만여 정보의 땅이 침수되고 한강 물이 광화문 앞까지 들이닥쳤다. 용산역 기차가 물에 잠겼다. 동부이촌동 뚝섬 송파 잠실리 신천리 풍납리 등 한강변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조선일보 7월18일자 호외는 이렇게 전한다. “뚝섬 상부에 있는 신천리, 잠실리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약 4000명이 전부 물속에 들어서 모두 절명 상태에 있다는데 그곳은 무인고도(無人孤島)와 같이 되어 배도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구조할 도리가 전혀 없으며 17일 밤 10시경부터 살려 달라는 애호성이 차마 들을 수 없이 울려왔는바 그동안 모두 사망하였는지도 알 수 없더라.” 

그야말로 물밀 듯이 내려오는 급류에 누가 감히 구조에 나서겠는가. 사공조차 도망가고 없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 조차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 일을 동아일보 7월19일자는 이렇게 전했다.

“17일 밤 뚝섬과 왕십리 사이는 완연한 바다로 변하야 사면이 양양한 물천지요, 더욱이 전기까지 끊어져서 암흑세계를 이루었는데 비는 그대로 퍼붓고 밤은 더욱 깊어가고 구할 길이 없던 바 배를 부리던 사공조차 제 몸 위험을 느껴 출동을 거절하며 출동 하였던 백 명의 공병대도 사나운 물결에 어느 곳에 피난민이 있는 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나뭇가지와 전선줄이 장애가 되어 배를 운용하지 못하여 수재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추사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 ‘판전’.
추사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 ‘판전’.

엄청난 홍수에 사공도 도망

가장 큰 비 피해를 입은 잠실 일대에서는 약 1000호 4000명의 주민이 모두 지붕 위에 올라 대피했다. 하지만 집까지 물에 잠겨 큰 느티나무 두 그루에 700여명이 올라가 구조를 요청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이 모두 물에 떠내려가게 생겼는데 그 때 봉은사 주지 청호스님이 뱃사람을 수소문했다.

그런데도 나서는 이가 없자 스님은 “사람을 구조해 오는 사람은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니 그제야 사공이 움직였다. 스님도 같이 배를 타고 신천리(현 송파구 신천동)까지 가서 노약자와 어린이부터 차례로 배로 옮겨 봉은사로 돌아왔다. 708명을 무사히 구조하여 배가 떠나자 얼마 후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뿌리 채 뽑혀 거친 물살에 떠내려갔다. 사람들이 올라가 피신했던 나머지 한 그루는 남아 있었는데 1970년대 잠실 개발로 없어졌다고 한다. 

자비를 들여 배를 띄워 떠내려가는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봉은사를 수재민 구호소 피난처로 사용토록 한 봉은사와 주지 나청호스님의 이야기는 언론에도 크게 보도돼 조선인 모두가 알게 됐다. 을축년 7월23일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한다.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주지 라청호씨는 목선(木船) 3척을 주선하여 부리도(浮里島)민 114명을 구호하여 자기 절에 수용하고, 18일에는 목선 두 척을 사서 잠실리(蠶室里) 주민 218인을 구하는 등 현재 봉은사에 수용된 자만 404인이라더라.”

스님의 공을 조선 전체가 칭송했다. 정인보 오세창 이상재 김규진 등 조선 최고의 지식인과 명사들은 이듬해 청호스님의 삶을 정리한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발간해 그 공을 칭송하고 기렸다. 오세창은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하여, 무쟁삼매의 경지를 얻었노라”고 했고 정인보는 “본래 그것(대홍수때 사람을 구한 일)은 불교의 진리이다. 다만 인연에 따랐을 뿐인데 유별나게 공덕이 있는 것이라 말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로써 세상 사람들을 감흥케 하였으니 만치 이 일을 드러내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굳이 사양치 않고 이 글을 적는다”고 했다. 이상재 선생은 “반야의 거룩한 배 가는 곳마다, 중생들 다 같이 살아나네”라는 내용의 글을 보탰다. 

1929년 7월에는 광주 수해 이재민 대표 이준식, 허훈, 이주원, 김성득, 김순기 등이 발기하여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를 세웠다. 비문은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스님이 짓고,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가 글씨를 썼다. 
 

청호스님의 공덕을 잊지 못해 구제된 사람들이 모아 세운 청호스님 수해구제 공덕비.
청호스님의 공덕을 잊지 못해 구제된 사람들이 모아 세운 청호스님 수해구제 공덕비.

칭송 부끄러워 한 청호스님

스님은 그러나 세간의 칭송을 부끄러워했다. 사람 목숨을 살리고 구호한 선행을 ‘괴사(愧事, 부끄러운 일)’라며 “산승(山僧)을 편달하고 격려하여 장차 어떤 경우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게을리함이 없이 더욱 분발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어찌 얼굴 붉어지지 않을 수 있으리오”라며 더 정진하라는 뜻으로 여겼다. 

봉은사의 헌신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고 크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으로 한강이남으로 수도 이전이 결정됐을 때 10만평이 넘는 부지를 내줬으며, 해방 후 동국대학에 남산 사찰을 캠퍼스로 희사했다. 경전 한글화를 위한 역경원을 지원한 것도 스님들 공부를 위해 중앙승가대학 재정을 맡은 것도, 종단 최초의 현대 건물도 봉은사의 희생과 지원이 뒷받침됐다. 

반년 넘게 그칠 줄 모르는 코로나19로 인한 실직과 폐업에다 천정 부지로 치솟는 집값에 한 숨 짓는데, 긴 장마로 인한 홍수 피해까지 겹친 2020년의 대한민국이 버드나무 위에 올라 간신히 목숨을 지탱하던 을축년 한강변 사람들 신세 같아 처량하다. 사공을 이끌고 건너온 청호스님은 더 이상 없는 것일까? 봉은사 입구에 서있는 청호스님 공덕비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중생 염원 안고 서 있는 봉은사 미륵불.
중생 염원 안고 서 있는 봉은사 미륵불.

[불교신문3606호/2020년8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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