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불타는 마음 속 번뇌 소멸 길 이르신
가야산 부처님 가르침 바다에 새기다


최초 총림 답게 암자마다 선원
자운 성철 일타 혜암 법전스님
수많은 고승 자취 가르침 남아

오늘도 출·재가 비구 비구니
화두 참선 매진 원융화합 가람

상왕봉에서 바라본 가야산. 앞에 보이는 봉천대 아래가 해인사다.
상왕봉에서 바라본 가야산. 앞에 보이는 봉천대 아래가 해인사다.

불교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결정적 장면 가운데서도 
명운을 가르는 순간이 있었으니 
불을 섬기는 가섭 3형제와 
그 제자 1000여명을 교화하고
‘타오르는 불의 법문’을 설하신 
가야산(伽倻山) 장면이다. 
인도의 가야산을 한국에 그대로 옮겼으니 
바로 해인사를 품은 합천 가야산이다. 

해인사와 산내 암자도.
해인사와 산내 암자도.

 

◇ 부처님 ‘불의 설법’ 가야산

성도(成道) 후 바라나시로 가신 부처님께서는 이 곳에서 첫 제자를 받아들이시고 초전법륜을 펼쳤다. 이후 갠지스강 남쪽을 건너 당대 최강국이던 마가다국 수도 라자그리하(王舍城)로 가셔서 불교가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는 기반을 다지셨다. 빔비사라왕으로부터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를 보시 받은 곳도, 계를 정하고 교단을 형성한 곳도,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등 10대 제자를 맞이한 곳도 왕사성이었다. 

바라나시에서 갠지스강을 건널 때 만 해도 최초의 5비구에다 야샤스와 친구 50여 명, 도망간 여자를 찾아 헤매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출가한 청년과 그의 친구 30여 명 등 90여 명에 불과했던 불교가 왕사성에서 주류 바라문교를 대체할 정도로 성장한 배경은 바라문교인 1000여 명을 한꺼번에 교화하는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경전마다 등장하는 ‘1250명 비구 대중’ 상용구를 만든 그 사건은 불교의 존망을 결정했다.

왕사성에 입성하기 전 1250 비구를 대동하고 오른 곳이 바로 가야산이며, 그 위에서 부처님께서는 ‘타오르는 불의 법문’을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비치는 형상이 불타고 있다….” 탐진치 삼독의 불이 우리를 불태운다는, 불교 교리의 핵심이 가야산에서 울려 퍼졌다. 산꼭대기에는 코끼리 머리와 같은 평평한 바위가 있어 상두(象頭)라고 했다.

이 땅에도 꼭 같은 이름을 가진, 산 맨 꼭대기 바위를 상왕봉(像王峰)이라 부르는 산이 있으니 해인사의 가야산이다. 수도권에는 며칠 째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아래 쪽은 폭염이 덮쳤다. 코로나도 여전히 물러갈 줄을 모른다.

가야산부터 오를지, 해인사부터 들를지 고민하다 전자를 택했다. 백운동에서 출발했다. 쉴 틈도 없이 계단길이 이어지더니 2km 넘는 거리를 위로만 향했다. 그래도 보람은 있다. 정상 까지 이어지는 암벽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데 아름다우면서 장엄하고 단순한데 기기묘묘하다. 억지로 키우지 않고 운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근육질 남성을 보는 듯 자꾸 눈이 간다. ‘해인사에 살면 순한 스님도 강단 있고 기개 높은 수좌가 된다’는 스님들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다.
 

가야산 절경을 보여주는 만물상.
가야산 절경을 보여주는 만물상.
선림원.
심원사.

◇ 칠불봉 아래 심원사와 백운동 절터 

숲이 끝나고 하늘이 나타나더니 암벽 아래 큰 절이 보인다. 심원사(深源寺)다. 백운동 방면에는 신라시대 대찰 법수사를 비롯하여 용기사, 백운암, 일요암 등 크고 작은 사찰이 많았지만 심원사만 복원했다. 템플스테이 등 수행 문화 도량으로 신도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야산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나다는 만물상(萬物像) 능선길이 이어지다 백운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서성재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숨 돌린다. 서성재를 지나면 또 다시 계단길이 이어진다. 마침내 칠불봉(七佛峰)을 만났다. 칠불봉은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과 왕후 허황옥 사이에 난 10명의 아들 중 왕이 되지 않은 7왕자가 출가하여 생불이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칠불봉 옆과 상왕봉(象王峰)이 가야산 최고봉이다. 상왕봉으로 가는데 ‘여기서부터 해인사 땅’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마음 자세가 달라진다. 철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지나온 만물상 구역과 해인사가 있는 치인리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우비정(牛鼻井)이라는 돌 우물이 있다.
 

가야산 정상 상왕봉.
가야산 정상 상왕봉.

평일인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올라와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비석에는 가야산 우두봉(伽倻山 牛頭峰)이라 한자로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상왕봉이라 병기했다. 이대로 두면 어느 날 한글로 작게 쓴 상왕봉은 사라질지 모른다. 부처님께서 1250 제자들에게 불을 비유해 법을 설하셨던 가야산 상두암이 바로 이 곳 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산과 바위에 새겼는데 왜 자꾸 지우려하는지 안타깝다. 

하늘을 떠받든다는 봉천대(奉天臺)를 지나자 해인사 원당암이 보인다. 원당암에서도 이곳 가야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오니 해인사의 출발이 원당암에서 시작한 연유를 알 것 같다. 밑으로 내려오자 작은 대나무 숲이 아래 까지 이어졌다. 지나온 길과 달리 흙길이다. 봉천대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 앞에 불상이 서있다. 석조여래입상이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264호로 지정돼 있다. 
 

석조여래입상.
석조여래입상.

◇ 용성스님 모시는 용탑, 사명당 홍제암 

해인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암자는 용탑선원이다. 백용성스님 탑을 지키던 제자들이 스님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절이다. 3·1운동을 이끈 민족 지도자이며 끊어진 계맥을 이어 불조의 혜명을 되살렸으며, 역경 포교 문화 불교 전반에 걸쳐 혁신과 대중화를 이끈 근대화 선구자이시며 선교율을 갖춘 삼장법사 백용성스님은 해인사는 물론 오늘날 한국불교의 뿌리다. 스님은 지금은 선원으로 쓰는 극락암에서 출가했다.

그 제자들이 오늘날의 조계종을 만들고 해인사를 지킨다. 석가모니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을 보호하며 수행하던 ‘보살’이 대승불교를 일으켰듯, 용성스님의 부도와 탑을 지키고 공부하던 제자들이 청정수행가풍을 지키고 승가공동체를 되살렸다. 일제가 대처육식을 권장하자 이를 중단하라는 건백서를 제출하고 대각교를 세워 민족불교 청정비구승단을 지켰으니 그 정신이 해방 후 정화운동과 조계종으로 이어졌다. 

용탑선원 옆은 사명대사 부도와 비가 있는 홍제암이다.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사명대사가 말년에 수행하다 입적한 곳으로 선조가 지어 하사했다. 입적 후 스님의 부도와 홍길동 저자 허균이 지은 석장비가 있으며 광해군이 표충사를 지어 임란 승병의 세 스승 휴정 유정 영규 대사를 모셨다. 1943년 일제 때 합천군수 다케우라가 석장비를 네 조각으로 훼손 한 것을 1958년 다시 보수해 지금도 십자가 모양의 상처가 있다. 북한산성을 축조했던, 승군대장 계파당 성능대사 부도도 사명대사 부도 옆에 있다.

홍제암에서 꼭 기억해야하는 고승은 자운스님이다. 용성스님 상좌인 자운스님은 은사를 이어 계율을 바로 잡아 청정계단을 세운 분이다. 스님이 아니었으면 한국불교는 여전히 복잡한 계맥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기차 안에서 계를 주던’ 혼란한 시대에서 모든 조계종도가 동일하게 수계하는 단일계단으로 통일하고 초대 전계대화상을 역임한 자운스님의 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김용사에 계시던 성철스님을 많은 사람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인사로 모셔 초대 방장으로 추대한 분도 자운스님이다.  
 

원당암의 혜암스님의 가르침.
원당암의 혜암스님의 가르침.

홍제암을 나서 계곡을 건너면 원당암이다. 원당암은 해인사를 낳은 어머니와 같다. 신라 애장왕은 부처님 가호로 공주의 난치병이 낫자 순응 이정 두 대사의 발원에 따라 국력으로 해인사를 창건한다. 당시 국왕은 서라벌을 떠나 원당암에서 불사를 독려하면서 국정을 볼 정도였다.

이에 원당암을 수도 서라벌 북쪽에 위치한 궁궐이라는 뜻에서 북궁(北宮)이라 부르기도 했다. 창건 당시 산 모양이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봉산(飛鳳山) 기슭에 있다하여 봉서사(鳳棲寺)라 하였고 진성여왕 시대부터 본격적인 신라 왕실의 원당이 되었기 때문에 원당암(願堂庵)이라 불렀다. 

해인사 창건 기지 역할을 한 원찰 답게 원당암에 서면 해인사의 주요 권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적광전과 대장경을 모신 장경각이 정면에 들어오고 그 오른쪽 희랑대가 보이며 백련암 뒤 환적대도 지척이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가야산 최고봉 상왕봉이 아련하다. 

그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공부하다 죽어라’고 쓴 돌기둥이다. 이 말은 제10대 종정을 역임하고 원당암에서 정진했던 혜암스님이 평소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가르침이다. 스님의 제자 무불스님은 이 문구를 평생 화두처럼 선방에 걸어놓고 정진한다. 원당암은 고시원처럼 운영되던 것을 총림 지정 후 혜암스님이 들어오면서 참선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재가자 전문 달마선원이 특히 유명하다. 서출동류(西出東流), 서쪽에서 나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가장 좋다는데 원당암이 그러하다. 

원당암을 나와 일주문을 거쳐 해인사로 들어섰다. 대적광전을 지나 장경각 아래 서서 올려다 본다. 대적광전에는 학인스님들이 저녁 예불 준비 중이었다. 무심코 걸어가는 스님 조차 자세가 흐트러짐 없다. 해인사 올 때 마다 안행(雁行)으로 줄지어 걷던 학인 스님들이 떠오른다. 엄격한 규율과 자부심 가득한, 가야산에서 보았던 봉우리와 바위 같던 스님들이다. 

다음날 해인사 선원을 지나 지족암(知足庵)으로 갔다. 선원과 율원 사이에 난 길을 따라가면 지족암으로 이어지는 숲속 오솔길이 나온다. 하안거 결제 중인 선원은 바람 소리 조차 숨죽였다. 경허스님부터 수많은 선객 고승을 배출한 역사를 좁은 지면에 옮길 수가 없다. 용성스님이 출가하고 지월스님이 주석했던 옛 극락암을 떠올리며 조용히 지족암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원당암에서 바라본 해인사.
원당암에서 바라본 해인사.
백련암 가는 길에서 바라본 희랑대와 지족암. 멀리 원당암이 있다.
백련암 가는 길에서 바라본 희랑대와 지족암. 멀리 원당암이 있다.

◇ 일가족 41명 출가 일타스님 자취 지족암 

지족암은 일타스님이 주석한 암자로 유명하다. 율사로 명성이 높았던 일타스님은 친가 외가를 합쳐 모두 41명이 출가했다. 일설에는 기네스북에 등재됐다고 한다. 어머니, 형, 누나, 여동생, 외조부, 외조모, 외삼촌, 외숙모, 외조카 등 일가족이 다 출가했다. 일타스님의 속가 형 월현스님이 지족암에서 입적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수행하던 외삼촌 법안스님의 권유로 출가한 월현스님, 지족암의 일타스님,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정진 끝에 65세에 견성한 외조부 추금스님, 일타스님 일가와 해인사 인연은 끝이 없다. 지금은 일타스님 제자로 불교신문 사장, 중앙종회의장, 해인사 주지 등을 역임한 향적스님이 주석한다. 

지족암에서 다시 나와 일타스님의 법호를 딴 다리 동곡(東谷)교를 지나 이끼가 낀 돌계단을 오르면 희랑대다. 희랑대사는 통일신라 말 고승으로 왕건 견훤 모두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화엄학파 최고승이었다. 생전 모습 그대로 본 뜬 목조각상(木彫刻像)이 보물 제999호로 전해온다. 2018년 고려건국 1100년을 맞아 개성에 있는 왕건상과 희랑조사상을 함께 전시해 1000년만의 사제상봉을 기획했지만 북이 동참하지 않아 불발 됐었다. 지금 희랑대는 해인사 율주 경성스님이 지킨다. 

희랑대 뒤쪽 바위 틈새로 난 오솔길이 백련암 가는 길이다. 제자 원택스님은 “철스님께서 퇴설당 방장채를 나와 희랑대 계단을 올라 이 길을 따라 백련암을 오가셨다”고 했다. ‘우리 곁에 오신 부처’로 추앙받는 ‘철스님’을 생각하며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바위 앞에 서니 지족암과 멀리 원당암이 조망된다. 절경이다. 

해인사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백련암은 조용했다. 스님의 독경소리만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누가 뭐라해도 백련암 주인공은 성철스님이다. 금강산 마하연, 통영 천제굴, 성전암 10년 동구불출 수행, 봉암사 결사를 거쳐 김용사에서 첫 사자후로 이미 선객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했던 성철스님은 종단 초대 방장으로 제격이었다. 더군다나 백용성스님의 손상좌이니 용성문중의 적통이다.

1967년 여름 백련암에서 하안거를 나던 성철스님이 해인사에서 열린 중앙종회에서 초대방장으로 추대됐다. 종정 청담스님이 종정을 던지는 대신 총림을 만들어 달라며 호소하고 자운스님이 성철스님을 모셨다. 자운스님은 용성스님 상좌니 승가 족보로 따지면 사숙이다. 체면 따지고 순서 따졌다면 어림없는 일이다. 자운스님은 그런 분이었다. 
 

백련암.
백련암.

◇ 희랑대 뒤 오솔길 끝 백련암 

총림은 수좌와 한국불교의 오랜 꿈이었다. 일제가 만든 대처로 인해 부처님의 정법 청정 가풍이 허물어져 해방 후에도 한국불교는 왜색 일변도였다. 젊은 수좌들만이 수천년 전통을 유지했다. 1946년 효봉스님을 방장으로 모시고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만든 것도 청정가풍을 되살리려는 수좌들의 원력이었다. 그러나 대처가 절을 운영하는 당시 방장이 모든 권한을 갖고 오직 수행에 몰두하는 총림을 제대로 끌고 갈 힘이 없었다.

그러한 현실 때문에 성철스님은 해인사 총림에 참여하지 않고 봉암사 결사를 준비했는지 모른다. 결국 해인사 가야총림은 실패하고 이듬해 문경 봉암사로 다시 결집했다. 청담 성철 자운 보문 우봉 스님 등 20~30대의 수좌들이 모여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결의를 다진 봉암사 결사가 20년 뒤 종단에서 결실을 맺었으니 1967년 해인총림이었다.

총림 제정을 이끌며 제도를 만든 청담스님, 집을 설계하고 주인을 들인 자운스님, 원효 이래 한국이 낳은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받은 성철스님, 그리고 궁핍한 절 운영을 책임진 영암스님, 지월스님, 모두 총림을 만든 주역이며 주인이다.

봉암사의 적명스님은 생전에 총림의 의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총림이 생기자 성철스님은 비구 승납 순으로 좌차를 정했다. 그 때까지 수좌는 계율이나 법도는 무시하는 것이 선사답다고 여겼는데 성철스님은 철저하게 비구 중심이며 계율을 중시했다. 그래서 나이 많은 구참들이 불만을 품고 많이 떠났다. 그런데 성철스님이 총림에서 규율을 잡자 종단 분위기, 선원이 달라졌다. 정말 총림 잘했다” 원택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그러나 가야산과 해인사는 한 도인이나 가문으로 지탱될 수 없다. 총림은 원융살림이다. 홍제암 원당암 지족암 백련암 희랑대 모든 암자가 주인이다. 또 모두 객이기도 하다. 본래 내 것은 없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가야산 정기가 해인사로 모이지 않고 계곡으로 흐르며 해인사에서 정상이 조망되지 않아 해인사는 객이 주인노릇 한다는 옛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해인사 뒤에 가야산 정상이 비치는 영지(影池)를 만들었는데, 그 보다는 객과 주인이 따로 없이 모두 하나되는 원융화합을 전하는 뜻인지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총림도 도인도 수단일 뿐 궁극의 목표는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 나를 해치고 세상을 무너뜨리는 삼독심을 없애고 얻는 진정한 행복이다. 부처님께서 가야산에서 이르신, 번뇌를 끊고 행복과 안락에 이르는 길이 우리가 가야산과 해인사에서 얻어야할 가르침이다. 
 

국일암.
국일암.

◼ 비구니 암자들 

국일암 약수암 삼선암 보현암
비구니계 큰 어른 족적 남아

해인사에는 많은 비구니 암자가 있다. 여러 교구본사 중에서 해인사가 가장 많은 비구니 암자를 두고 있다. 그 대부분이 선원을 운영한다는 점도 특별하다. 일제시대 강원을 개설했던 국일암을 비롯 삼선암 반야선원, 약수암 죽림선원(竹林禪院), 보현암선원, 금강굴, 금선암에 이르기까지 해인사 비구니 스님들이 주석하는 암자는 모두 선원을 개설하고 정진한다. 

백련암에서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방향에 자리한 국일암은 규모는 작지만 그 역사와 품은 이야기는 거대하다. 국일암(國一庵)에는 일제시대 비구니 강원이 있었다. 

1893년 자홍스님이 창건하고 1904년 보찬 지종 두 스님이 중건한 삼선암도 비구니 문중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1955년 비구니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교구본사 주지를 역임하고 1926년 국일암 대교과를 수료하는 등 선교 가람불사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긴 성문스님이 삼선암에서 가행정진하며 제자들을 제접했다. 성문스님의 속가 동생이며 최초의 비구니 전계사 정행스님도 삼선암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약수암 죽림선원은 1904년 비구니 성주스님이 창건하고 1927년 도삼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972년 법공스님이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선원을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비구니 스님들 문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청해문중은 청암사 백련암과 해인사 약수암의 앞 자를 따서 지었다.

원당암 바로 아래 계곡에 위치한 금선암은 1945년 하담스님이 창건했다. 해인사 입구에서 계곡을 지나 오른쪽 산으로 향하면 보현암과 금강굴이 나온다. 보현암은 1973년 혜춘스님이 창건했다. 혜춘스님은 비구니계의 큰 어른으로 1985년부터 95년까지 초대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역임하며 비구니 교단 확립에 큰 기여를 했다.  

보현암과 나란히 있는 금강굴은 1976년 창건한 비구니 스님들 수행처로 성철스님의 혈육 불필(不必)스님이 계셨다. 
 

약수암.
약수암.
보현암과 금강굴.
보현암과 금강굴.

해인사=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604호/2020년8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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