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임을 자각해 고기 먹지 않는 게 공덕 쌓는 일

“육식은 폭력적으로 만들어
업을 더 크게 짓게 하는 산물”

고기 꼭 먹어야 한다면
‘오정육’ 이야기 참고해 볼만…

“건강위해 먹을 때 용납
취미로 잡아먹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불자가 돼서 고기를 먹어도 됩니까? 철저히 먹지 말아야 합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불자임을 자각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공덕을 쌓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불가피하게 고기를 먹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큐멘터리 촬영차 티베트 사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절 마당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마침 고기를 썰고 있다가 우리 일행이 들이닥치자 아주 당황해하면서 숨기려고 하였습니다. 그 고기는 ‘야크’라는 소고기였습니다. 야크의 단백질은 고산지대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좋은 말로 안심시켰습니다.
 

모든 문화와 관습은 반드시 그 지역의 자연환경적 특수성과 연관을 갖는다. 지나가는 이방인이 그냥 며칠, 몇 달 빼꼼히 들여다보고 자기 잣대로 옳거니 그르거니 입을 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특히 티베트 스님들의 야크 고기 섭취 부분은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티베트 천공사에서 고기를 구해 가는 스님들.
모든 문화와 관습은 반드시 그 지역의 자연환경적 특수성과 연관을 갖는다. 지나가는 이방인이 그냥 며칠, 몇 달 빼꼼히 들여다보고 자기 잣대로 옳거니 그르거니 입을 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특히 티베트 스님들의 야크 고기 섭취 부분은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티베트 천공사에서 고기를 구해 가는 스님들.

“아, 저희들은 다 이해합니다. 이런 데서는 건강을 위해서 꼭 드셔야 합니다. 산소가 희박하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순수하기 그지없는 티베트 스님들은 제 얘기를 듣고는 하던 일을 마음 편하게 계속했습니다. 

그쪽 사정을 모르는 한국 스님들이 간혹 “절에서 왜 고기를 먹어” 하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만, 이는 무례하기 짝이 없고, 무식 또한 도를 넘는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티베트 스님들은 우유를 넣은 수유차를 꼭 마십니다. 객으로 간 사람들이 “너희들, 왜 우유를 먹어”라고 하면 안 될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야크 고기든 수유차든 건강을 위해서 먹지 않을 수 없는 약 같은 것입니다. 좀 더 부언하자면, 티베트 스님들은 수행을 정말 다부지게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중생제도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그런 음식을 먹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와 같이 건강 때문에 고기를 꼭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고기를 먹는 것도 일리가 있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고기를 먹을 때는, 건강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 것이지, 취미로 잡아먹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오정육(五淨肉)을 얘기해 왔습니다.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라는 뜻입니다. 삼정육이니 구정육이니 하는 말도 있습니다. 오정육, 즉 먹어도 되는 고기에 대해서 말씀드릴 테니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불견살육(不見殺肉)’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죽이는 것을 보지 않은 고기’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직접 생명체를 죽여서 고기를 확보하는 수가 있는데, 그것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접 죽이는 것을 보지 않은 고기는 먹어도 무방합니다.

둘째는 ‘불문살육(不聞殺肉)’입니다. ‘내 귀로 죽어가는 비참한 소리를 듣지 않은 고기’를 말합니다. 또는 소문에 의해서 ‘아, 그 소가 비참하게, 그렇게 그렇게 죽어갔더란다…, 도살장에 들어가는데 눈물을 뚝 뚝 흘리면서 억지로 걸음을 옮기더라….’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 그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소리를 듣지 않은 고기는 깨끗한 고기라고 할 수 있으니 먹어도 무방합니다.

셋째는 ‘불위아살육(不爲我殺肉)’입니다. ‘나를 위해서 죽은 고기가 아닌 것’을 말합니다. 다니다 보면 더러 ‘개무덤’ 같은 것도 있지요? 그 개는 필시 주인을 위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입장에서, 아무리 죽었다고는 하지만, 차마 그 개의 고기는 먹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또 예를 들자면, ‘소’가 열심히 밭 갈다가 더위 먹어서 죽은 경우에 소 주인은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다가 죽은 그 소의 고기를 먹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죽은 짐승의 고기는 먹지 않는 것이 좋은데, 그렇지 않으면 먹어도 무방합니다. 여기까지가 삼정육인데 두 가지를 더 보태면 오정육이 됩니다.

넷째는 ‘자사육(自死肉)’입니다. ‘생명이 다해서 죽은 고기’를 말합니다. 수명이 다해서 죽은 짐승의 고기나 자살해서 죽은 짐승의 고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기는 먹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자잔육(自殘肉)’입니다. ‘짐승끼리 싸우다가 뜯어먹고 남은 고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슴 뼈가 무릎 관절염에 좋다 해서 딴 동물이 뜯어먹다가 남은 것을 산에서 주어다가 먹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매 같은 새에 희생당한 동물의 잔해가 있다면 그것을 먹는 것은 괜찮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고기, 오정육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런 정도의 고기는 건강 때문에 먹는다면 용납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우니,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세 번 손을 거친 고기는 먹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세 번 손을 거친 고기라면 자기가 그것을 본 것도 아니고, 들은 것도 아니고, 또 자신을 위해 죽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 번 손을 거친 고기라면 식육점이나 마트에 나와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일반 시장에 나와 있는 고기는 재가자(在家者) 입장에서는 먹어도 무방합니다. 대신 잘 먹었으면 그 에너지를 좋은 데 써야 할 것입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감당이 안 될 정도는 삼가야겠지만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단백질 공급 차원에서는 먹어도 좋습니다. 먹은 만큼 그 힘을 좋은 데 쓴다면 고기 먹는 것이 아주 나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고기를 언제부터 먹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부처님 당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헤아려볼 점이 많습니다. 부처님 계시던 시절에는 다 아시다시피 탁발에 의지해서 먹는 것을 해결하였기 때문에 취사선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남방불교 상황을 보면 감이 잡힐 것입니다. 남방은 탁발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공양을 올리고 싶은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그날 자기들이 먹는 음식 중에 최상의 것을 바루 속에 담아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고기가 들어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무튼 탁발은 주는 대로 먹는 것이 미덕입니다. 그래서인지 부처님 당시는 물론 현재 남방불교 계율에는 ‘육식금지’에 대한 강한 얘기가 없습니다.

북방불교 쪽의 보살계를 살펴보면, 보살계 십중대계에서 ‘살생하지 말라’고 하였을 뿐, ‘고기 먹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살생하지 아니함’과 ‘육식을 하지 않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48경구계(輕垢戒), 즉 48가지 가벼운 계에는 ‘고기를 먹지 말라’란 말이 나옵니다. 이는 북방에서 임의로 만들어진 계율일 가능성이 큽니다. 북방의 계율을 수용한다면 육식은 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지만 건강상 어쩔 수 없이 먹게 된다면 인간들과는 인연이 먼 것을 먹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보다는 사람 외의 포유류 고기를 먹고, 네 발 달린 짐승보다는 두 발 달린 짐승을 먹고, 두 발 달린 짐승보다는 발 없는 물고기를 먹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더 내려가면 식물인지 동물인지 구별이 안 되는 생명도 있는데, 그런 것은 부담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내려가면 식물입니다. 식물도 결국은 생명이지만 우리 인간과는 진화론적 입장에서 멀리 있으므로 가장 먹기가 만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을 먹으면 피도 덜 탁해질 뿐만 아니라, 자비종자를 잘 보존하는 일이 됩니다. 육식은 성격을 폭력적으로 만듭니다. 업을 좀 더 크게 짓는 계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의 결론적인 얘기입니다. 고기는 안 먹는 것이 상책이지만, 꼭 먹을 일이 있더라도 우리랑 인연 관계가 먼 것을 먹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드셨다면 고기를 먹고는 그 힘을 좋은 곳에 써야 합니다. 

불자들이 ‘고기 먹는 문제’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첫째, 고기는 너무 자주 먹지 말라. 둘째, 오정육은, 먹어야 할 경우에는 부담 없이 먹어라. 셋째, 가능하면 인연이 먼 것을 먹어라. 넷째, 남의 살을 먹었으면, 그 힘을 좋은 데 쓰라.

우리 불자들이 ‘고기 먹는 문제’ 때문에 더러 고민이 많으신데,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 이 글은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① 對人卽佛(대인즉불)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사람 형상의 불(佛)자. 우학스님 作.
사람 형상의 불(佛)자. 우학스님 作.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늘 나를 반응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를 집중하게 할 뿐 아니라, 나를 깨어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는 바로 부처입니다. 

가족 한 명 한 명이 다 내게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친구, 도반들도 그러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부처님들이 주위에 가득합니다. <법화경>에서 저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은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당신은 곧 부처님입니다’라고 덕담하면서 존경의 예를 표시했습니다. 그러할 때 그 상불경보살이 곧 부처님입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가 너무 살벌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존경심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도덕 기강은 무너지고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우리 불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메시지인지 모릅니다.

불성(佛性), 부처의 성품을 가졌으니 다 부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자 여러분.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서 대하고 있는 사람’이 부처임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그리하면 자신도 부처가 될 것입니다. 부처로 대하는 자가 곧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가 자존의 가치를 높일 때 이 세상은 살맛이 납니다.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부처님으로 보여지도록 스스로가 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불교신문3604호/2020년8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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