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말을 초월한 곳에 실재

“그대들이 밖으로 향하고 옆집을 찾아 헤매면서 찾아보아도 그르칠 뿐이다. 단지 부처를 구하려하나 부처란 이름이며 글귀일 뿐이다“라고 임제 선사는 두 눈 부릅뜨고 설하였다. 

부처란 모두가 이름에 불과하며 푸른 소를 탄 도인께서도 이렇게 말했다. “도를 가히 도라 할 수 있는 것은 떳떳한 도가 아니요, 이름을 가히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떳떳한 이름이 아니다.” 도(道)는 말을 초월한 곳에 실재하는 것이며 말과 함께 글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생들도 태어날 때 완전 구족한 근기를 타고 났기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가르치고 있지만, 스스로 미망에 갇힌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깨어 있지 않는 행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든 부처님의 표상이며 천상과 인간세상의 스승이시며, 세상에서 번뇌를 끊어 더 이상 끊을 것이 없는 분이시며,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할 분이다. 누구에게라도 마땅히 공양 받을 분이 된다는 것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서예작품에는 낙관이라는 부분이 있다. 작품을 할 때 호(號)를 쓰는데 추사 노장은 500여 개 넘었다고 한다. 생각이 갈 때 마다 경계에 맞춰 호를 지어 자신의 정신을 매만졌기에 우리에게 완당 노장은 영원불멸의 스승이며 호는 또 다른 작가의 의지 표현이다. 내 자신도 몇 십 개의 호를 작품의 글제와 그때의 조건에 따라 쓰고 있다. 내 공부를 넘어서기 위한 지독한 경책이고 다짐이고 반성이고 깨움이다. 자호(自號)를 해놓고 공부가 부족해 못 쓰는 호도 있다. 

부처님 여래십호는 절을 올리며 부를 때마다 명치끝이 찡하고 가슴 저린다. 이번 작품은 부처 불(佛) 자의 표기를 달리한 옛 글씨이다. 중국에서는 부처를 이렇게 정의하여 쓸 수밖에 없었을까? 하지만 이 한자를 만날 때 나는 앉은 자리에서 생각의 찌꺼기가 사라지는 통쾌함을 느꼈다. 가끔씩 전시회 때도 작품으로 소화하여 세간 속에 던져놓았다.

눈 밝은 이는 보고 화들짝 놀란다. 만나기 쉽지 않은 풍경이다 새로운 글자를 만나는 일은 가슴 치는 일이며 혁명적인 창작 행위의 단초가 되며 내 수행의 새로운 경계를 열어주기에 늘 바쁘게 찾아 허둥거린다. 

나에게 부처란 어떻게 한자로 표기해야 할까! 불제자들께서도 부처란 기억된 상식 없이 정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생각해 보지도 고민해 보지도 못했다. 글자를 만나는 그 자체가 기쁨이기에 달리 그 무엇을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한번 깨물어 볼 생각이다. 서예작품의 글씨를 해체분석 해보면 참으로 선명하고 머리 맑아지는 경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며, 형상 넘어 정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깊이 무겁게 참구해볼 일이다. 

옛 선현들은 한 글자 때문에 턱수염을 다 뽑을 만큼 고뇌하였다고 한다. 형상은 형상 일뿐이다. 뗏목을 짊어지고 시내를 다닐 수 없는 것이다. 뗏목은 형상이고 허상이며 이름 일뿐이다. 선사들께서는 고함치고 쥐어박고 몽둥이 내려치지만 또렷하게 다가오는 의미에 한 기쁨 느끼는 것도 큰 공부이다. 

조사는 조사일뿐 품계나 이름은 이름 일뿐이다. 프로필은 지나버린 일이며 한 줄의 약력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 무슨 실체가 아니다. 완전한 자기를 만나는 일이 본래 자기를 찾는 일이며 영원한 불제자의 화두이다. 나는 스스로 부족하지만 불자 서예가가 되고 싶어 힘주어 이야기 한다. 무늬만 불자가 아닌지 흔히 초파일, 동지 불자는 아닌지 자성할 일이다.

명함 뒤에 숨지 말고 나서야 한다. 실력이 이르지 못하면 헛이름 일 뿐이다. 헛이름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깊이 반성한다. 앞산 송화산이 물 폭탄에 사라져 버린 천근만근의 한밤중이다. 

[불교신문3604호/2020년8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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