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이 비어 있다. 땡그랑 소리내며 마지막 동전 한 닢이 어디론가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서운할 것도 없다. 세상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않다>는 <않다>일 뿐이다. 괄호 안에서 멋대로 까무러쳤다 깨났다 하면 된다. 말하자면, 가을에 모과는 모과가 되고, 나는 나대로 넉넉하고 넉넉하게 속이 텅 빈, 어둡고도 한없이 밝은, 뭐라고 할까, 옳지, 늙은 니힐리스트가 되면 된다.

- 김춘수 시 ‘어느 날 문득 나는’ 전문
 


김춘수 시인은 산문시 쓰기에 대해 “산문시는 나에게 있어서는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 즉 물리세계와 심리세계의 화학적 배합이요 대립의 지양이다”라고 말했다. 

짧지만 이 산문시에서도 시인의 이러한 뜻이 잘 드러난다. 텅 빈 호주머니로부터 공적(空寂)한 마음과 이치를, 실체가 없고 상주(常住)가 없음을 깨닫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하는 것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된다. 서운해 할 까닭도 없이 말이다. 무거울 때가 있고 가벼울 때가 또 있듯이, 어두우면서도 한 없이 또 밝기도 하므로 우리는 그때에 그것을 바로 보면 된다. 그래야 넉넉하고 넉넉해질 것이다.   

[불교신문3603호/2020년8월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