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사자후] <49> 이두스님
[다시 듣는 사자후] <49> 이두스님
  • 김형주 기자
  • 승인 2020.08.03 08:51
  • 호수 3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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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15일자 칼럼 ‘진실한 지도자 아쉬운 시대’
“용서할 일과 하지 못할 일을 분명히 가려야”


계행 못 지켜 누가 되었던 일은
참회할 경우 받아 질 수 있지만

宗財 사유화 개인적 이권쟁취
중상모략은 있을 수 없는 일

혁신의지 근원은 창조에 있어
시비부터 하는 개혁은 삼가야
2001년 청주 관음사에서 친견한 스님은 “스님이나 재가불자나 누구나 정직하고 옳게 살아야 돼. 지 마음대로 욕심내며 살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해”라며 “욕심에서 과감하게 ‘탈출’하는 것이 삼독을 제거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정도(正道)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신문
2001년 청주 관음사에서 친견한 스님은 “스님이나 재가불자나 누구나 정직하고 옳게 살아야 돼. 지 마음대로 욕심내며 살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해”라며 “욕심에서 과감하게 ‘탈출’하는 것이 삼독을 제거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정도(正道)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신문

옛말에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이라는 말이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을 말로서는 남에게 교시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지도자가 맑지 못하면 후배들도 불행해지고 그 불신을 후배들은 감당해야 한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지도를 받거나 지도를 하게 되는 존재다. 지도를 잘 받아야 하고 지도를 잘해야 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한 세대의 잘못된 지도계층(指導階層)의 영향 때문에 오랫동안 악순환의 시대를 맞게 되는 불행은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보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 환경(環境)에서 익히고 배운다. 

그러므로 가정교육은 일생을 좌우(左右)하는 인생의 뿌리가 된다. 개천에서 용마(龍馬)가 나온다는 말이 있지만 설사 개천에서 나와 용마가 되었다 하더라도 개천의 버릇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용마이기가 일수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먼 미래의 상황을 사심(私心)없이 이타적(利他的) 관념에서 그려보면서 용심(用心)과 행동을 해야 한다. 지도적(指導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사실에 없는 것까지 위장해서 명예를 드높이고 하는 일이 있다면 후배들은 그런 것만 배우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고 마는 게 아니라 미래인(未來人)들의 불행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기 협잡꾼도 운수 좋으면 출세한다고 한다. 물론 출세하는 게 밉고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내내 그와 유사한 버릇으로 출세했고 조금도 자기과오에 뉘우침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도자가 진실치 못하고 사실 아닌 수단으로 입신출세(立身出世)하는 것을 보면 후배들은 꼭 그대로 본을 따게 된다. 

교도소에서 강도혐의로 구속된 아들을 찾아가 우는 어머니를 대한 아들의 말이 명언이었다고 한다. 

“어머님은 내가 이렇게 된데 대해 책임이 있는데 왜 우십니까. 어려서부터 남의 물건만 훔쳐오면 칭찬해 주셨기 때문에 익힌 도둑질 때문에 신세가 이렇게 된 것은 어머님 뜻대로 된 것입니다. 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반성이 없는 원인을 따지는 원망이었다. 

오늘날 우리 종단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순수창조(純粹創造)의 관심보다는 종권(宗權)을 목적화 하는 경향이라든지 마치 승려가 종권을 잡고 휘둘러야 살맛이 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년시대의 가치관은 젊은이 자체에도 문제가 있지만 지도자로 흘러간 선배들의 책임도 더 큰 것이 아닐까. 

우리의 보람은 중생구제(衆生救濟)라는 교리적 신념에 입각해서 보람을 가져야 한다. 오늘 날 기독교의 번성을 불교와 비교해서 말하면서 종단을 탓하는 젊은 승려를 더러 만나지만 기독교가 오늘 번창한 것은 교단(敎團)의 싸움이거나 교단 원조의 소산이 아니다. 황무지(荒蕪地)에다가 천막을 치고 전도하는 개척교회의 번성에서 팽창을 보게 된 것이다. 

불교가 발전하자면 무(無)로부터 유(有)를 만들어 내자는 창조의욕이 젊은이들 마음에 불타고 있어야 한다. 편하게 살기 위해서 남을 줄 수 없고 남의 것을 뺏어야 된다는 시비나 일삼고 있다면 어느 단체든지 발전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굳이 종단의 개혁을 힘으로 싸우면서 하려하지 않아도 선진의식으로서 창조와 노력을 겸하다 보면 창조적 변화 속에서 지난 것은 밝은 것이 되어 혁신은 저절로 되는 것이다. 

혁신의지(革新意志)는 창조에 있어야지 시비부터 하는 개혁운동은 바람직 할 수 없다. 우리는 용서할 일과 하지 못할 일을 분명히 가려야 한다. 계행(戒行)을 못 지켜 개인과 종단에 누(累)가 되었던 일은 참회를 했을 경우 받아 질 수가 있지만 종도(宗徒)가 함께 먹고 살아야 할 종재(宗財)를 사유화 한다든지 또는 사사로운 이권쟁취를 위해 같은 종도끼리 중상모략하고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야만 진실한 생활의 풍토를 이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실치 못한 지도자들이 살면서 개천에서 용이 나기만 기다린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의 희망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의 이상이 고원(高遠)하지 못하고 종권쟁취(宗權爭取)에 목적을 두는 현상이 보이는 것은 그들이 그런 것만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고 보면 선배(先輩)들의 책임(責任)은 무거운 것이다. 선배들이 탈속(脫俗)하고 진실하고 고상한 창조성(創造性)이 있었다면 왜 닮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후배들은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 선배들이야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할 것 없이 자기 창조가 있어야 한다. 선배들의 인생이 내 인생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꼭 선배들을 닮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종단분규에 젊은이들이 끼어들어 어른들을 헐뜯고 다니는 것은 앞으로 더 이상 없기를 기대한다. 
 

1985년 5월15일자 불교신문 6면에 실린 ‘진실한 지도자 아쉬운 시대’ 주제의 이두스님(인천 보각선원)의 칼럼.
1985년 5월15일자 불교신문 6면에 실린 ‘진실한 지도자 아쉬운 시대’ 주제의 이두스님(인천 보각선원)의 칼럼.

◼ 이두스님은…

1929년 태어난 스님은 1950년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포로로 붙잡혔다가 탈출한 뒤 들른 갑사에서 탄성스님으로부터 출가를 권유 받고 1951년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금오대선사를 은사로 수계 득도했다.

당시 금오대선사는 ‘이 뭣고’ 화두를 던지면서 “제대로 살려면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용맹정진하고, 한시도 화두를 놓치면 안 된다”고 일갈을 했고, 스님은 10일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로써 구도를 향한 열정을 스승에게 보여 주었다. 이후 금오대선사를 모시고 김천 직지사 천불선원과 옥포 금연사, 수원 팔달사 등에서 정진하면서 선 수행의 기반을 철저히 닦았다. 

1956년 대구 동화사 강원에서 공부한 뒤 1959년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2년 육도만행을 결심하고 전라도 일대에서 엿장수와 걸인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경남 진주에서 문학공부에 전념하기도 했다. 1964년 전남 장성에 흙집을 지어 <능인교민원>이라 이름 짓고 6년 간 학동들을 가르치는 등 두타행을 실천했다.

스님은 늘 온화하고 자애 넘치는 모습으로 금오문중의 후학들에게 사표가 되는 어른으로 수행했다. 1971년 공주 갑사 주지, 1978년에는 속리산 법주사 주지를 지내면서 10·27법난 속에서도 금오가풍을 올곧이 지켜냈다. 종단의 교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1982년 인천 보각선원장, 1986년 청주 관음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도량을 일신하고 중창하여 청주의 대표적 사찰로 만들었다. 1992년 서울 도심에 해동불교대학을 설립하여 10여 년간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도제를 양성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금오문도회 문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10월에는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되었고 2004년 5월 해인사에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스님은 누구보다 문학에 사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를 통해 세상에 전했던 문인이기도 했다. 1978년 첫 시집 <겨울 빗소리> 발간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끊임없는 시작(詩作)활동을 하면서 독자들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구원의 양식을 제공했다. 

1984년에 <현대시조> 추천으로 시조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충북시조문학회장과 서울동백문학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종교인으로서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동백예술문화상(문학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창문에 울린 초음>, <그대가 만나는 산길>, <만나고 헤어지는 물가에> 등 여러 권의 시집과 수상집을 발간했고 한편으론 구도소설 <명암이 없는 선하 앞에서>를 발표하는 등의 활발한 집필 활동을 했다.

스님은 평소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인과를 철저히 믿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스님은 입적하기 전 후학들에게 “지나간 모든 것은 다 바람일 뿐이다. 스스로 인생의 주체가 되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임종에 즈음한 시를 써서 제자에게 전달했다. 

“인생은 한 조각의 꿈/ 그동안 살아온 삶이 세월 따라갔고/ 세월 속에 나도 따라갈 뿐이다./ 맑은 바람 밝은 달 너무도 풍족하니/ 나그네길 가볍고 즐겁구나./ 달빛 긷는 한 겨울, 복사꽃이 나를 보고 웃는다.”

월암당(月庵堂) 이두(二斗) 대종사는 2017년 11월4일 새벽 3시 청주 관음사 석수실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랍 66년, 세수 90세. 

정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3603호/2020년8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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