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연꽃제 기억사진전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는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입기 전 봉선사의 사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사진=봉선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는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입기 전 봉선사의 사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사진=봉선사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진 한장이 역사로 남는 법이다. 
언제 무엇을 하다 찍은 것인지도 모르는 
낡고 허름한 사진을 쫘악 펼쳐놓으니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봉선사가 7월20일부터 25일까지 진행한 제18회 연꽃제의 기억사진전도 그런 자리다. 
6·25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기 전 봉선사 전경과 폐허로 남은 봉선사의 모습, 
다시 이를 하나하나 복원중창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공개됐다. 

교종 본찰이자 본산이었던 봉선사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대종이 쓰러질 듯 덩그러니 남았다.
교종 본찰이자 본산이었던 봉선사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대종이 쓰러질 듯 덩그러니 남았다.
산신각 외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탔다.
산신각 외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탔다.
경전 한글화의 상징과도 같은 우리말 현판이 걸린 큰법당을 다시 세운 것은 1970년의 일이다.
경전 한글화의 상징과도 같은 우리말 현판이 걸린 큰법당을 다시 세운 것은 1970년의 일이다.
청풍루.
청풍루.
운하당도 세워졌다.
운하당도 세워졌다.

가장 잘 보존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 국립광릉수목원은 조계종 25교구본사 봉선사의 배산(背山)이다. 산감을 두어 광릉숲을 보존해온 봉선사의 공로가 결코 적지않다. 그러나 봉선사는 역사적으로 수도 서울로 진입하는 동북쪽 관문에 위치한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국난의 질곡을 관통한 사찰로 꼽힌다.

조선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교종 본찰의 사격을 갖췄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로 폐사 직전까지 몰렸다. 그때마다 이 땅에 불교를 다시 세우듯 도량도 다시 회복한 것은 숭유억불정책을 거치면서도 백성과 함께 했던 불교의 저력이 깃들어있다.

봉선사가 ‘기억사진전’을 통해 공개한 사진은 6·25 한국전쟁 당시 참화를 입은 폐허의 모습부터 지금의 봉선사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공개된 사진만으로도 전체적인 복원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봉선사는 6·25 전쟁으로 폐허로 바뀌기 전까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본산 가운데 하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봉선사의 모습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넓고 가지런히 펼쳐진 전각은 사세와 위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은 봉선사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16동 150칸에 이르던 전각이 소실되고 오로지 산신각과 회랑채만이 남았다. 보물 397호인 봉선사대종은 폐허 가운데 바닥에 넘어질 듯 남았다. 6·25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상잔이었듯 봉선사에 닥친 참화 역시 우리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더더욱 놀랍고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 후 봉선사는 교구분할 과정에서 본사에 포함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다시 교구로 분할되고 봉선사가 본사로서의 위상을 되찾은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이때 봉선사는 경기 북부와 동부를 관할하는 25번째 교구로 지정됐다. 20여 년의 세월과 현대사에 길이 남을 대강백 운허스님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봉선사는 교구 사무실을 본사에 두지 못하고 소속 말사인 불암사에 차렸다. 지금과 달리 서울에서 봉선사까지 하루가 꼬박 걸릴만큼 교통이 불편한데다가 복원한 건물도 많지 않아 교구종무소를 둘 형편이 되지 못했다. ‘기억사진전’에 전시된 사진 속에서도 교구 지정 후 첫 25교구 본말사주지회의를 의정부고등공민학교(현 광동여중고교)에서 열어야할 정도였다. 

옛 사격을 되찾기까지 50여 년의 복원불사가 있었다. 1959년 범종각 복원을 시작으로 운하당과 후원, 동별당과 요사가 차례로 복원됐다. 주법당인 대웅전을 다시 세운 것은 1970년의 일이다. 운허스님은 대웅전에 ‘큰법당’이라는 우리말 현판을 내걸었다. 운허스님으로부터 월운스님으로 이어진 경전 한글화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동진출가해 봉선사 복원과정을 지켜본 운허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선우스님(남양주 보광사 주지)은 “남북 분단으로 홀대받았던 경기 북부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운허큰스님과 만허스님, 운경스님, 조실 월운스님 등 어른들의 피와 땀으로 봉선사가 지금의 사격을 갖추게 된 것”이라며 “기억사진전에 내놓은 50여 장의 사진들을 통해 대중이 지난한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20여 년에 걸쳐 폐허가 된 봉선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로자는 대강백 운허스님이다.
20여 년에 걸쳐 폐허가 된 봉선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로자는 대강백 운허스님이다.
교구지정 후 회의공간이 없어 광동학원 의정부고등공민학교에서 처음 본말사주지회의를 열었다.
교구지정 후 회의공간이 없어 광동학원 의정부고등공민학교에서 처음 본말사주지회의를 열었다.
교구 본말사 승려수련대회도 열었다.
교구 본말사 승려수련대회도 열었다.

[불교신문3602호/2020년7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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