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차마 신뢰하지 못한 까닭

불교상담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이야기다. 임인구의 ‘어엿한 그대’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마음이, 또 그 마음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온전한지를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어엿하게 서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연기법에 근간하여 역설과 상호관계성의 원리로 안내한다.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고 마음 자체를 친구처럼 또는 연인처럼 대하는 직접화법으로 구성된다.

임인구
임인구

이런 글이나 찾아 읽고 있는 그대여. 그러한 그대라면 필시 삶에서 떠밀려나간 추운 변두리에서 하루하루를 부질없이 그저 목숨만 붙이고 있는 그대일 것이다. 물론 그대에게도 열심히 살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대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잠도 아껴가며 노력하던 역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 허물어졌다. 그대가 세운 모래성은 가차없이 무너져 내렸고,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같이 그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야 말았다. 그대의 신세는, 삶의 변두리에서 그대라는 판자집만을 겨우 유지하고 사는 마음의 빈민층이다. 그래서 그대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이다. 그대의 신세가 180도로 반전될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이런 글이나 찾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곧 내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대의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위대한 내기가 필요한 것이다. 좋다, 그대여. 그렇다면 내기를 하자. 나는 나의 전부를 걸도록 하겠다. 나는 그대와의 내기에서 나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아니, 확신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안다. 내가 반드시 이긴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뿐이다.

그대는 이 삶의 주인이다. 이 사실에 나는 모든 것을 건다. 절대로 지지 않을 이 내기에 나의 모든 것을 건다. 그대는 분명하게 이 삶의 주인이다. 분명하다. 부정될 수 없다. 그대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된 이유 또한 이와 같이 단순하다. 그대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차마 신뢰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대는 다른 누군가를 이 삶의 주인처럼 보며, 그에게 주인의 자리를 양도하고, 점차 그대는 변두리로 향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오해가 있었다. 주인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힘의 담지자를 의미하는 것으로만 그대는 오해했던 것이다. 그대가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가용할 수 있는 힘이 충분치 않았던 그대는 그래서 그대 자신을 주인으로 승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여. 주인은 단지 힘의 담지자가 아니다. 주인은 먼저 책임의 담지자다. 그대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 대하여, “그래, 이것은 나의 책임하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 언제나 그것이 바로 삶의 주인으로 그대가 세워지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처럼 말하는 그대는, 이미 그 순간 그대 안을 가득 채우는 힘을 느끼게 된다. 힘은 그대가 책임을 선언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그대에게 수여된다. 스파이더맨이 말하듯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큰 책임에는 큰 힘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대가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그대는 다만 오해라는 이름으로 모르는 척 했던 것뿐이다. 그럼으로써 힘과 책임을 분리시키고, 책임은 다른 이에게, 힘은 그대에게 부여될 수 있는 현실을 꿈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여, 그러한 현실은 없다. 책임을 가진 이가 힘을 갖게 되어 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게 그대는 힘만 갖고자 하고 책임은 넘기려 함으로써, 결국 그 책임을 받은 다른 이가 그대 대신에 삶의 주인으로 행세하게끔 되었고, 그대 자신은 오히려 꿈꾸던 현실과는 상반되게 삶의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대의 모습은 마치, 책임은 부모에게 넘기고, 자신은 부모의 힘만을 동경하며 그 힘을 손쉽게 얻어내려고 하는 아이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대 자신조차도 미숙한 아이를 삶의 주인 자리에 앉히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대가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일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대여, 그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대가 있는 그 변두리에서도 삶의 주인이다.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그대는 삶의 주인이다. 그대는 분명하게,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가슴 아프게 울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그대의 책임이다. 삶은 그토록 분명하게 그대의 책임하에 있다. 삶은 주인인 그대의 아래를 떠난 적이 없다.
 

삽화=손정은
삽화=손정은

그렇게 그대는 이 삶의 변두리에서도 그대의 주인됨을 외친다. 그 어떤 삶의 지평 위에서도 그대는 자신이 삶의 주인임을 부르짖는다. 흐느끼는 눈물로, 새어나오는 자조로, 몰아치는 분노로, 터져나오는 통곡으로, 그 어떤 때라도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그 사실만을 시간 속에 새기고 또 새긴다.

그대여, 그러니 이제 단순하게 말해보자. 명쾌하게 그대의 맑은 목소리를 울려보자. “이것은 나의 책임이다.” 돌아온다. 그대가 잃었던 힘이 돌아온다. 다시 찾아진다. 그대가 잊었던 힘이 다시 찾아진다. 그리고 보이기 시작한다. 그대가 있는 그곳이, 그대가 주인됨을 선언한 그 자리가, 어느새 중심이다. 그 어떤 변두리라 할지라도, 그대는 그곳을 반드시 중심으로 바꾸어낸다. 그것이 바로 주인된 그대의 힘이다. 우주의 변두리 행성인 지구를 창조의 중심으로 만든 사람의 힘이다.

그와 함께, 그대가 해야 할 일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대여, 책임(responsibility)의 정확한 의미는 ‘응답할 수 있는 역량’이다. 곧, 책임은 응답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응답은 그대 자신의 간절한 필요를 향한 것이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 이것이 바로 책임의 원형이다. 가장 신성한 힘이다. 그대여, 삶의 변두리에서 스스로의 주인됨을 선포한 그대여, 그대는 그 변두리의 모진 조건 속에서도 스스로를 귀하게 만들 거룩한 자기돌봄의 힘을 행사할 수 있다. 그대는 감히 스스로를 돌보아도 좋다. 거친 변두리에서도 스스로를 귀하게 돌보는 그대의 모습을 목격한 많은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라, 여기에 사람이 있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 그대는 여기에도 사람이 있을 수 있게 만든, 여기에도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든 위대한 미지의 개척자다.

그대로 말미암아, 삶의 영토는 장대하게 확장되며, 사람의 온기는 가장 차가운 변두리에까지도 전해진다. 비록 자신이 그 어떤 불친절한 조건에 놓였을지라도, 그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을 귀하게 돌보며, 응원하고, 스스로를 존엄하게 만들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사람의 힘이고, 사람의 대단함이다. 그렇게 사람은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우뚝 선 그 자리로, 그대가 지금껏 고립된 변두리의 판자촌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으로, 이제 사람들이 온다.

그대가 온 몸으로 뜨겁게 개척해낸 길 위로, 그대가 한 몸으로 열심히 걸어온 까닭에 만들어진 그 눈물어린 길 위로, 이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누가 이렇게 좋은 길을 냈을까? 누가 이 추운 변두리에서도 이토록 따듯하게 사람 사는 향기를 풍기고 있을까? 누구의 마음이 이처럼 고운 걸까? 너무나 궁금히 여기며 사람들이 그대의 개척지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놀라워하며 눈길 위를 정답게 걸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멀찍이 바라본다. 그러한 그대는 분명 힘차게 미소짓고 있을 것이다. 그 눈빛은 한없이 깊을 것이다. 다정한 마음이다. 삶의 주인된 그대다.

[불교신문3602호/2020년7월29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