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14> 통일신라불상⑤ 경주 남산 칠불암 불상과 신선암 보살상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14> 통일신라불상⑤ 경주 남산 칠불암 불상과 신선암 보살상
  • 배재호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 승인 2020.07.31 11:00
  • 호수 3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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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은 왜 남산 꼭대기에 불상 모셨을까

당나라 장안 자은사 대안탑에
약사불 석가불 아미타불 미륵불
사면에 불상 선각 신라에도 영향

칠불암 마애불삼존상, 사방불상
인도 마하보리사 정각상 비롯해
중국의 탑 사방불상 함께 표현돼

꽃가지 든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용화수 가지 든 미륵보살로 보여
법상종 스님 조성한 것으로 추정

경주 남산은 7세기 중엽부터 신불(神佛)교체의 장소이자 승려들의 선관(禪觀) 수행처가 되면서 불상 조성이 시작되었다. 남북 길이 8km, 동서 폭 4km, 높이 495m의 남산은 왕경(王京, 경주) 오악 중 남악으로서 다른 산과 달리 불상이 지속적으로 조성된 곳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150여 곳의 절터와 107존의 석불·마애불은 이러한 정황을 알려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시대 835년의 윤을곡(潤乙谷) 마애삼존불상과 고려시대 1022년의 용장사지(茸長寺址) 마애불좌상을 제외하곤 명문을 갖춘 예가 없어서 남산 불상의 조성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전반에 조성된 칠불암 불상이다. 불삼존상(불좌상 2.66m, 협시보살상 2.11m), 사방불상(동면불상 1.18m, 남면불상 1.0m, 서면불상 1.13m, 북면불상 0.72m).
통일신라시대 8세기 전반에 조성된 칠불암 불상이다. 불삼존상(불좌상 2.66m, 협시보살상 2.11m), 사방불상(동면불상 1.18m, 남면불상 1.0m, 서면불상 1.13m, 북면불상 0.72m).

통일신라시대의 남산 불상들은 산 중턱과 정상 가까운 곳에 사찰 건립과 함께 조성되었는데, 남산 동남쪽 봉화곡(烽火谷)의 칠불암(七佛庵) 불상도 이 중 하나이다. 칠불암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경주 남산 불상 중에서 조성 연대가 가장 앞서고 조각 수준도 매우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 불상도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에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과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 파편 5점과 고려시대 초기의 “四□寺(사□사)”명 기와가 절터에서 발견되었을 뿐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 배경을 알 수가 없다. 

칠불암 불상은 커다란 바위 면에 돋을새김한 불삼존상과 그 앞에 놓인 방형의 바위 네 면에 각각 1존씩 새겨진 불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삼존상은 윗부분을 돋을새김(고부조)으로, 아랫부분을 얕은새김(저부조)으로 표현하는 일반적인 마애상과 달리 위아래 조각의 깊이가 비슷하다. 불삼존상 중 불상은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항마촉지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불상은 솟아 오른 육계, 원만한 상호, 당당한 어깨, 안정된 자세를 갖추고 있다.

비록 부분적으로 정돈되지 않았으나 법의 주름과 연화대좌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 엿보인다. 연화대좌는 월지(月池, 안압지)에서 출토된 8세기 초의 금동판 불삼존상과 형식적으로 유사하며, 불상을 대좌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은 공간감은 8세기 초의 영주 가흥리 마애불삼존상과 닮았다.

각각 연꽃과 정병을 들고 있는 협시보살상도 상당히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이다. 우협시 보살입상의 네모난 버클 장식은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가슴 장식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이러한 조형적인 특징은 마애불삼존상이 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임을 알려 준다.

칠불암 불좌상의 착의법과 수인은 석굴암(石窟庵) 주존 등 이후 왕경 경주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는데, 인도의 보드가야(Bodhgaya)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의 정각상(正覺像)에 그 원류를 두고 있다. 당나라 645년에 인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현장(玄奘, 602-664)의 뒤를 이어 당과 신라의 많은 승려들은 석가모니 붓다의 성지를 순례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범어(梵語) 경전으로 직접 공부하기 위하여 인도로 유학을 떠났다.

구법승들은 인도에 머물면서 여생을 마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귀국하여 당과 신라의 불교와 불교미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귀국할 때 경전은 물론, 인도 불상을 비단에 그려오거나 작은 불상들을 몸에 지니고 돌아왔다. 이러한 불상 중에서 7세기 후반의 당과 8세기의 통일신라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구법승들이 반드시 들러서 예불했던 마하보리사의 정각상이었다. 

마하보리사 정각상은 석가모니 붓다가 보드가야(Bodhgaya, 불타가야佛陀伽耶)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마하보리사의 주존 불상이다. 정각상의 모습, 크기, 앉아 있는 방향은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과 통일신라에서 이 상을 모델로 조성한 항마촉지인 불좌상은 대부분 석가모니불상이지만, 때론 당시 유행하던 신앙에 따라 아미타불상과 약사불상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다만 칠불암 불좌상이 석가모니불상인지 아니면 당시 유행하던 신앙에 의해 재해석된 불상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바로 앞에 있는 바위 네 면에는 마애불삼존상의 불좌상과 얼굴 표정, 연화대좌, 광배 형식이 닮은 불상이 각 면에 1존 씩 새겨져 있다. 이들 불좌상은 마애불삼존상의 불상과 달리 모두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연화좌 위에서 가부좌하고 있다. 불상들은 크기와 조각의 깊이가 서로 같지 않고, 같은 높이에 새겨져 있지도 않지만, 신체 비례, 착의법, 아무 문양이 없는 보주형 두광, 연화대좌가 닮아서 사방불상의 초기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칠불암의 마애불삼존상과 사방불상을 밀교의 오방불(五方佛)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마애불삼존상은 사찰 법당의 주존을, 사방불상은 사찰의 불탑에 새겨진 사방불을 표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칠불암 불상의 구조는 석굴 중앙에 탑 기둥(탑주)을 세우고 그 네 면과 석굴 안쪽 정벽에 각각 불상을 조성한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중심탑주식(中心塔柱式) 석굴을 연상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칠불암의 건축 구조가 이 석굴 형식과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중국에서 중심탑주식 석굴이 유행하던 북량(北涼)시대부터 수(隋)나라 때까지는 마하보리사 정각상을 모델로 한 항마촉지인 불좌상이 조성된 예가 거의 없고, 항마촉지인 불좌상이 조성되던 7세기 후반이 되면 이 형식의 석굴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칠불암 불상의 구조가 중심탑주식 석굴을 답습하였다면, 유행 시기가 서로 맞지 않은 중심탑주식 석굴과 항마촉지인 불좌상이 함께 조성된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결국 칠불암 마애불삼존상과 사방불상은 7세기 후반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유행한 마하보리사 정각상과 탑 사방불상을 함께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7세기 후반에 조성된 당나라 수도 장안의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에는 동면에 약사불상, 남면에 석가모니불상, 서면에 아미타불상, 북면에 미륵불상이 선각(線刻)되어 있는데, 그 영향에 의해서 신라에서도 탑 사방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칠불암 불상이 조성되던 8세기 전반에 대안탑의 영향은 감산사 아미타불입상의 명문에서도 확인되듯이 신라의 불탑을“(대)안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칠불암 사방불상의 존명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동면에 약기(藥器)를 든 약사불좌상이 새겨져 있어서 대안탑의 사방불과 같이 남면에 석가모니불상, 서면에 아미타불상, 북면에 미륵불상이 표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불암이 조성되던 8세기 전반이 되면, 이미 신라에서 석가모니불 신앙, 미륵불 신앙, 아미타불 신앙, 약사불 신앙이 한 차례씩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분위기도 신라에서 사방불상의 도상을 수용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 조성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높이 1.9m.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 조성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높이 1.9m.

한편 칠불암 위쪽에는 바위 면을 얕게 파낸 다음 돋을새김한 신선암(神仙巖) 마애보살반가상이 있는데, 대좌 밑에 구름 조각이 표현되어 있어서 공거천(空居天, 수미산 위 천상)의 보살임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오른손으로는 꽃가지를 들고 있다.

보살상은 오른 다리를 아래로 내려뜨리고 왼 다리는 대좌 위에 둔 반가좌(혹은 유희좌遊戲坐)를 취하고 있다. 상체에는 천의를 두르고 있으며, 하체에는 치마를 입었는데, 치맛자락은 대좌를 덮고 흘러내리고 있다. 보살상은 장방형의 둥근 얼굴과 양감을 갖춘 몸을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수미산(須彌山) 위의 공거천 중 하나인 도솔천(兜率天) 내원(內院)에 있는 보살 중 한 존으로 추정되는데, 완전하진 않으나 미륵보살의 전형적인 좌세인 반가좌로 앉아 오른손으로 용화수(龍華樹, 나가푸슈파 nāgapus.pa) 가지를 잡고 있어서 미륵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 후, 미래의 인간 세상에서 태어나 여덟 번째로 붓다가 된 미륵보살은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조성된 8세기 후반에 경주 남산에서 법상종 승려들에 의해 예배 대상으로서 만들어졌다. 경덕왕대에 활동한 법상종의 승려 태현(太賢, 대현大賢)이 남산의 용장사에서 미륵존상을 예불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특히 그가 찬술한 <본원약사경고적(本願藥師經古迹)>이 칠불암 출토 약사석경(藥師石經)에 사용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의 주석서라는 사실은 석경을 주도한 칠불암의 승려가 법상종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칠불암이 법상종 사찰일 가능성은 칠불암에서 대안탑 사방불의 도상을 수용하여 사방불상을 조성한 것에서도 확인되는데, 대안탑은 당나라 법상종의 본찰 자은사의 불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져 8세기 후반에 칠불암 승려들에 의해 신선암에서 법상종의 주요 존상인 미륵보살을 마애보살반가상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8-9세기 조성된 경주 용장사지 전경. 사진=김세영
통일신라시대 8~9세기 조성된 경주 용장사지 전경. 사진=김세영

[불교신문3602호/2020년7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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