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만큼 사람다워지는 것

혜인스님
혜인스님

‘어엉엉.’ 법당에서 기도하다 보면 가끔 뒤에서 울음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참아왔던 슬픔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그 소리가 참 아름답다. 참 사람답다. 그래, 슬픔은 참 사람다운 일이지. 우리가 ‘참 저 사람답다’고 표현할 때에도 ‘저’라는 지시어보다 ‘사람답다’는 서술어에 방점이 찍히면 같은 사람끼리 ‘저’니 ‘이’니 하며 다투지 않아도 될 텐데.

슬픔이 아름다운 건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는 만큼 슬퍼지니까, 슬픈 만큼 사랑한다는 거니까. 사람만큼 슬퍼하는 생명을 본 일이 없다. 사람만큼 울고 사람만큼 죽는 생명을 본 일이 없다. 사람만큼 사랑하는 생명을 본 일이 없다. 그니까 슬픈 만큼 사람다워지는 거다.

헌데 사람들은 눈물을 터뜨리고 나면 다들 죄송하다고 말한다. 눈물을 보이는 게 부끄럽다고 말한다. 눈물이 없는 사람이, 슬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슬프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슬픔을 보이면 함께 슬퍼지니까. 상대방이 자기 때문에 슬퍼진 줄 알고 미안해할 테니까. 그게 싫어서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거겠지.

그치만 슬픔이 싫어지면 사랑도 싫어질 텐데. 사랑이 싫어지면 사람도 싫어질 텐데. 누군가는 사랑이 커지는 만큼 아픔도 커지는 거라며 사랑을 말라고 당부하신 부처님(佛)이 사람(亻)이 아닌(弗) 분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부처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부처님이 이 대목에서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저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쁘셨을까. 이 말씀을 하시며 얼마나 슬프셨을까. 요즘은 경전을 읽으며 이렇게 내 가슴 저미게 되거늘. 수행자가 된 모든 이들은 아마 진정 사람답게 살고 싶던 이들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다움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너무 슬퍼서. 그래서 슬픔이 싫어져 사랑을 않는다고 한다. 포기하면 편하다면서, 사랑을 포기하는 모습에 또 내 가슴 저민다. ‘무엇이 저 사람의 사람됨을 포기하게 한 걸까’ 하며 그 슬픔을 나누고 싶다가도, 그럴 자신이 없어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게 되는 건 내가 아직 사람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러셀이라는 사람은 <행복의 정복>에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했거늘. 미래에 더 슬프기 위해 현재의 슬픔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으니, 지금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면 나중에 얼마나 더 슬프게 될지 모르니. 애써 슬픔을 외면하며, ‘나는 슬프지 않다’고 자위하는 그 모습에 참 내 가슴 저민다.

다행이다. 우리 어머니 아프실 때 많이 울어서. 아픈 우리 어머니 외출하시며 식탁에 간식 올려놓고는, ‘사랑하는 엄마가’라는 메모 보며 맨날 울어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 달을 울었다. 그러고도 슬픔이 마르지 않아, 출가할 때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하며 또 펑펑 울었다. 그러고 출가 결심을 밝히자 이번엔 가족들이 울었다. 미안하다며 울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마음껏 함께 슬퍼할 수 있었어서 다행이다.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도 펑펑 울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버스 안에서도 울었다. 밥 먹다가도, 자다가도 울었다. 그렇게 울고 집 앞에 찾아온 옛 연인은 내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이다. 마음껏 슬퍼하며 이별할 수 있었어서 다행이다.

우리 슬픔을 부끄러워 말자. 슬퍼하는 사람 부끄럽게 말자. 슬퍼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니, 사랑하는 만큼 사람다워지는 것이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사람보다 아름다운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만큼 사람다운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우리 슬픔을 미루지 말자.

[불교신문3601호/2020년7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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