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70> 금강경의 수행론㉒ 삼세심(三世心)의 불가득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70> 금강경의 수행론㉒ 삼세심(三世心)의 불가득
  •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 승인 2020.07.27 08:11
  • 호수 3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흐름은 실체가 없다

본인 업에 의해 오해하고
보고 싶은 모습 투사할 뿐
집착 놓으면 실체 사라져
등현스님
등현스님

초기경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산냐(想)에는 건전한 산냐와 불건전한 산냐의 두 가지가 있다. 빠빤짜로 확장되어서 자아의식이 발생하는 것은 불건전한 산냐이고, <금강경> 역시 17장에서 7가지 산냐를 여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7가지 산냐는 크게 자아와 법에 대한 산냐(想)이다. 

첫째, 아상(我想)을 여의여야 한다. 아상이 있으면 자아의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여서 남을 도와준다 할지라도 아상(我想)을 낼 나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 깨달아야 할 법이 없다는 것이다(法空). 석가모니불 역시 연등불에게서 깨달아야 할 법이 없음을 알았기에 수기를 받았다는 것이고, 셋째, 오고가는 산냐(想)가 없음을 여래라 하니, 여래의 뜻은 본래 참되고 여여하게 오거나 갔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오거나 감이 없고, 모든 법이 해체된 불생불멸(不生不滅)임을 말한다.

넷째, 보살은 법상(法想)을 여의었고, 다섯째, 법에 자성이 없음을 알아 법상(法想)을 여의면 일체법(一切法)이 불법(佛法)이 된다. 이 말은 산냐를 여읜 자는 모든 것에 [장애를 받지 않고] 뜻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諸法如意).

여섯째, 보살은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산냐(想)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든 법이 해체된 상태가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제법무아를 깨달은 자가 보살이다. 이는 사물(一合相)의 해체된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는 일합상이라는 사물에 대한 착각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은 개념들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개념(산냐)을 해체하면 생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개념을 해체한 여래는 사물을 어떻게 인지하고 삶을 영위하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그러한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18장 일체동관분이다. 여래는 5안이 있기 때문에 개념의 프리즘을 통하지 않더라도 사물을 인지하고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다.

육안은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이다. 천안은 중생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행위와 과보를 보는 눈이고, 혜안은 중생이 해체된 미시적 상태, 공성을 보는 눈이다. 법안은 5온, 12처, 18계, 12연기, 4성제 등을 보는 눈이니, 나와 세상, 그리고 의식을 보는 것을 말한다. 불안(佛眼)은 일체종지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계(界)의 장애를 받지 않고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오안을 통해서 여래는 오염된 샨냐를 의지하지 않고도 사물을 바르게 인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눈으로 여래가 갠지스 강에 있는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흐름을 보았을 때 마음과 오온은 자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 첫째, 마음은 의식이고 의식은 근과 경이 촉했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조건적 발생이며,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한다.

둘째, 의식은 견분과 상분의 결합이다. 예를 들어 연필에 대한 의식은 연필을 아는 마음(見分)과 연필에 대한 이미지(相分)의 합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대상(境)으로부터 발생했으나 감각 기관에 의해서 이미지(nimitta)로 전환되고, 마음은 그 이미지만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견분은 아는 마음, 심(citta)이고, 상분은 알려진 내용물, 심소(心所, cetasika)이다. 

넷째, 마음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흐름이다. 마음은 선, 악, 중립의 상태를 오고 가는데, 그 대부분이 습관적이고, 과거의 성향을 대부분 이어받는다. 과거의 마음의 성향은 현재로, 현재의 마음의 성향은 미래로 흘러가기에 마음의 흐름은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물은 고정된 상태로 있는 것도 아니기에 무상하며, 본인의 업을 따라 마음에 의해 오해되어지고(癡), 잡아당기고(貪) 밀쳐내어서(瞋) 본인의 업을 따라, 본인이 보고 싶은 모습을 그려내어(투사하여) 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마음의 흐름은 자성이 없어서, 집착을 놓은 자에게는 해가 오면 어둠이 사라지듯 실체를 잃고 사라지게 된다. 어둠은 경험되어지는 진실이지만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흐름’은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으며,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 한다. 

[불교신문3601호/2020년7월25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