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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참선' 가풍 잇는 평생의 정진

속리산 깊숙이 자리한 조계종 제5교구본사 법주사. 반결제라 불리는 여름안거의 한복판, 법주사 총지선원은 잠시 정진을 멈추었다. 오직 깨달음을 향해 달려온 지난 45일의 공부를 점검하는 시간이다. 총지선원 정진대중과 함께 80 노구에도 하루 10시간 참선하고 있는 선덕 함주스님에게 옛 사진 한 장을 요청했다. 고이 간직해오던 은사 금오스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마주했다.

올해 80살의 법주사 선덕 함주스님은 법주사 총지선원에서 매일 똑같은 정진을 이어가고 있다. 은사 금오스님을 가운데 모시고 제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함주스님은 뒷줄 맨 오른쪽에 있다.
올해 80살의 법주사 선덕 함주스님은 법주사 총지선원에서 매일 똑같은 정진을 이어가고 있다. 은사 금오스님을 가운데 모시고 제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함주스님은 뒷줄 맨 오른쪽에 있다.

 

#1

오랜 승납을 자랑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평생을 수행하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당대의 선지식이자 정화에 앞장섰던 은사 금오스님은 앉으서 서나 참선하라는 가풍을 세웠다. 제자는 일러준대로 수행납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함주스님은 18살 되던 해 범어사 원효암으로 입산했다. 당시 원효암에는 정관스님이 있었다. 원로의원 정관스님은 당시 20대였다. 정관스님 문하에서 득도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통도사와 화엄사를 거쳐 동화사에 이르러 금오스님을 만나 삭발염의했다. 19607월 보름이다.

금오스님과의 인연은 참선 가풍 때문에 맺어졌다. 함주스님은 참선 수행 보다 경전 공부가 좋았다. 그러나 몸이 약해 경전 공부를 오래 이어갈 수 없었다. 단식을 병행하는 참선을 하며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선방을 다니다 어쩔 수 없이 주지를 맡아야 하는 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주지가 싫어서 이내 선방으로 돌아왔다. 강진 백련사, 군산 은적사에서도 그랬다. 주지 맛이 들리면 헤어나지 못한다고 경계했다.

#2

걸망을 매고 다다른 절엔 항상 객실이 있었다. 사찰에서는 객승이 오면 객실을 내어주고 공양을 주었다. 절을 나설때는 가까운 곳을 갈 정도의 여비를 쥐어주었다. 그때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형 월남스님이 태백산 각화사 주지로 있을 때, 함주스님은 탄성스님과 월성스님이 있던 각화사 위 동암으로 갔다. 정확한 연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1960년대 말에서 1970년 초에 이르는 시기다.

각화사는 신도가 몇 없을 때였던지라 동암에는 불자들의 발길이라고는 닿지 않았다. 탄성스님과 월성스님, 함주스님 셋만 살았다. 셋 뿐이었으나 계행과 수행은 철저했다. 참선, 방선, 공양, 기도, 취침에 이르기까지 하루 일과가 정진 아닌 것이 없었다. 8년의 용맹정진이었다.

먹을거리는 각화사에서 얻어왔다. 사형사제지간이기에 위아래가 있었으나 모든 일에는 차별이 없었다. 군불을 때서 중탕밥을 짓는 공양을 준비할 때는 한명은 쌀을 씻어 밥을 짓고 다른 한명은 국을 끓였다. 나머지 한명은 설거지를 맡았다. 분명히 역할을 나눈 공주(共住)의 수행이었다.

#3

안거 중 선원은 삭목일이 있다. 삭발을 하고 목욕을 하는 날이다. 보름에 한번 또는 10일에 한번 돌아온다. 함주스님이 정진 중인 총지선원은 열흘 마다 삭목일이 있다. 함주스님은 삭목일을 쪼개 소선당(素禪堂)에서 손님을 맞이하기도 한다. 꾸밈없이 소박한 소선당은 함주스님을 닮았다.

함주스님은 사진첩을 따로 두지 않았다. 사진첩을 두어야할 만큼 사진이 많지 않은 탓이기도 하고, 굳이 옛 사진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랍에서 묵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법주사에서 은사 스님과 찍은 사진이었다. ‘俗離山 法住寺 1965.10.5.‘라 적혀 있다. 금오스님이 입적하기 3년 전이다. 대불입상과 팔상전을 배경으로 찍었다. 왼쪽으로 사천왕문, 오른쪽엔 법주사라는 현판을 단 건물이 보인다. 종무소로 보이는 이 건물은 지금은 없다. 대불입상도 지금의 청동대불과 다르다. 1937년 세워진 이 입상은 시멘트로 조성됐다. 금이 가고 오래된데다 보존가치가 떨어져 1980년대 청동대불로 대체됐다.

함주스님은 사진 속 은사 스님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은사 스님의 흔적과 가르침은 여전히 또렷이 남아 있다. 한때는 수행과 공부가 은사 스님에게 부끄럽지 않기를 바랐으나 그 또한 놓은지 오래다. 그저 똑같이 정진할 뿐이다.

법주사=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601호/2020년7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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