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히 살피고 돌아보아야 한다

어느 날 문득 사는 일은 주저 없이 들이닥친다. 서예를 평생 직업으로 하는 나에게 원고를 쓰는 일도 그 또한 마찬가지이며 작두날 위에 서는 기분이다.

시골 적거지에 불쑥 얼굴 내미는 비온 뒤의 청량한 바람에 티없이 맑은 풍경소리가 깨어나지 못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흔들어 깨운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이 평범한 진리.” 나의 작업에 빗대어보면 틈나면 붓글씨 쓰고 몇 권의 책 읽고 글제를 찾아나서는 일은 나에게는 가장 거룩하고 행복한 일이다.

내가 살아가는 전부가 이 한 물건에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더듬고 깨물고 문자명상의 인위적인 공부인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한 물건인 것이다. 한 점은 돌아앉고 한 획은 선기 담지 못해 부족하지만 수행을 더해가면서 선해질 것이라 믿으면서 큰 벼루에 먹을 갈고 화선지를 매만진다. 이제 먹이 나를 갈고 있다. 이 일은 나의 수행의 방편이고 50년 넘게 평생 이 물건이 방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지극한 복됨에 늘 두 손 모으며 고개 숙인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고 수양이며 사람됨이며 한사람의 전부인 것이다. 수행을 묻는 이에게 붓글씨로 써서 내어주는 노스님의 “조심하라” “조심하라” “조심하라” 이 자상한 가르침의 말씀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나를 에워싸는 전율이고 가래침을 내 뱉듯 가르치는 그 독설보다 아린다. 이런 경지의 노스님을 뵙고 싶다. 

사는 일은 세심히 살피고 돌아보아야한다. 요즘 세상 자신의 위치에서 중심잡고 살기 쉽지 않다. 일어날 때 일어나고 앉을자리 앉기도 더 쉽지 않다. 세간살이 거의 절반은 엇박자이듯 내 작품도 서력이 더할수록 어렵지만 깊어지기 위한 아픔이라 생각하면서 심사가 뒤틀린 붓대를 한마음 살펴 다시 세워 잡는다. 붓글씨에 붓을 세우는 일은 나를 세우는 일이다.

서예와 불교의 수행과정은 둘이 아니다. 불교에 요체가 있듯 서예에도 정법이 있다. 늘 조심스럽게 겸손히 붓을 들고 머리 숙이고 온전한 나를 만난다. 쇠를 갈아 바늘 만들듯 한마음 지키고 탁마하며 언젠가는 편안함과 따스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 불가의 중도에 딱 들어맞는 중봉(中鋒)의 필법으로 화선지를 채워갈 것이다. 몰록 찾아들어 “인생이 무엇입니까” 묻는 이가 있다면 붓을 들고 무엇을 쓸까 돌아앉은 방석에 다시앉아 만나볼 일이다.
 

솔뫼 정현식
솔뫼 정현식

※ 필자는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동국대와 불국사승가대에서 서예를 지도하는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서울 학고재, 백악미술관, 일본 등에서 개인전을 14회 개최했다. 솔뫼 서체 9종을 개발하고 저서로 <노자도덕경> 등 6종이 있다. 해인사와 갓바위 등 여러 사찰의 현판과 주련을 썼다. 경주에 머물며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솔뫼서예연구소장. 

[불교신문3600호/2020년7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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