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선등선원 경자년 하안거 반결제날
칠월의 지리산 녹음이 짙다. 찌는 더위를 코앞에 두고 막바지 장맛비가 한창이었던 탓이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지천이 환상인 구례다. 가문 날이 지나며 폭우가 이어지고 1년 중 가장 덥다는 대서가 바짝 턱 밑까지 쫓아왔지만, 흐린 구름 속에서도 한순간 빛이 내리고 청명한 밤이 찾아온다. 화엄사 뒷길 사립문을 열고 야생화가 호위하는 길목을 오르면 ‘선의 등불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선등선원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하안거 결제 꼭 절반(半)이 지나던 날, 45일 만에 다시금 마음자리를 다스리고자 자유 산행을 떠난 스님들 덕에 금역 곳곳에 발이 닿을 수 있었다. “에어컨이 없어 미안합니다.” 객을 기다린 선등선원 선원장 본해스님이 건넨 첫 인사다.
“가만 앉아 있으면 한여름에도 냉기가 돈답니다.” 삼복더위의 서막, 맹위를 떨치는 더위에도 선풍기 하나면 그만이라는 선원장 스님이다. 안거 중인 모습을 담고 싶다는 말에 본해스님은 “대중들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며 다시 미안하다는 말만 남겼다.
어느 곳보다 위계가 엄격한 곳이 승가지만 선원만큼은 예외다. 30년 동안 제방 선원에서 안거철과 산철 가리지 않고 수행해온 수좌 본해스님도 선객의 기색부터 먼저 살핀다. ‘대중 화합과 정진에 방해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게 선등선원의 중차대한 청규 중 하나다.
그 중심엔 좌차(座次)는 철저히 따르지만 대중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선원에도 개인 방사가 생겨났지만 청규는 더 엄격하고 빈틈없어진 까닭이다.
선등선원도 결제 때만큼은 개인을 철저히 지운다. 갓 들어온 스님이든 30년 이상 수행에만 전념해온 구참 수좌든 안거 때만큼은 한 명의 출가 수행자에 불과하다. 새벽3시부터 오후9시까지, 2~3시간씩 수행과 포행이 반복된다. 매주 토요일엔 한 명도 빠짐없이 청소 울력에 나선다.
삭발일도 열흘 주기로 날이 정해져 있다. 대중 차담은 격일 사시에만 가능하다. 전자 기기 사용은 물론 신문 보는 일도 안거 때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퇴방 1순위는 논쟁과 괴각 행위다. 대중 질서에 따르지 못하고 화합을 해하는 자는 선방에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청규가 오롯한 선원 안팎은 분별없이 정갈하다. 너른 마당엔 먼지 하나 찾기 어렵고 대방 안 좌복은 하나같이 간격이 일정하다. 모두 이번에 방부를 들인 22명 납자들의 것이다.
이들 법명과 소임이 빼곡히 적힌 용상방이 한 쪽 벽을 지키면 불단을 마주한 어간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청산이, 왼쪽은 백운이 앉는다. 선원에 상주하는 청산 대중 스님이나, 한 철 살다 구름처럼 떠나는 운수 납자나, 남은 45일 동안 또 다시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몰두하며 장판 때를 쌓을 것이다.
텅 빈 선원을 보고 있노라면 푸른 선기가 가득한 착각이 인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쥐려는 진흙탕 세계에서 납자들은 ‘무(無)’로 마음의 평화를 채운다. 덥고 습하고 코로나로 인해 매일 같이 분기탱천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소박하고 간소한 삶을 수행자의 지복으로 삼아 흐트러짐 없이 정진하는 납자들을 떠올리면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눈부신 초록에 젖어 한여름 냉기에 취해, 매순간 생생히 깨어있는 수행자들을 보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화엄사=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이준엽 광주·전남지사장 maha0703@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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