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리타, 네가 왜 작곡까지 하고 그래?”

“예술이 역사를 바꾸지는 못하나 역사를 밝게 비추는 거울과 같다.”
- 오스발트 슈펭글러 

 

보일스님
보일스님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요즈음 종종 듣게 되는 유행어이다.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의 발전은 오래된 우리 기억 속의 ‘전설’들을 소환하곤 한다. 뜬금없이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강남스타일을 들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김광석의 목소리와 창법으로 들을 수 있다.

이건 또 어떤가. 인기가수 아이유의 ‘밤 편지’를 가수 박효신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고, 그 반대로 박효신의 ‘야생화’는 아이유의 목소리로 감상할 수 있다. 처음엔 어색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절묘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부른다면 혹은 다른 음악가가 연주한다면, 어떨까 하고 이미 떠나간 전설적인 아티스트들을 떠 올리곤 하니까 말이다.

➲ 작곡하는 인공지능 ‘쿨리타’ 

이제 아무리 음치라고 해도, 인공지능을 통해 누구든지 자신의 목소리 샘플만 추출된다면, 직업 가수 못지않은 가창력의 소유자로 탈바꿈시켜주는 정도는 덤이다. 소위 ‘가창 음성합성(SVS) 알고리즘’을 이용한 인공지능은 특정 가수의 목소리를 다른 노래와 합성하여 그 특유의 음색을 재현할 수 있다. 가사나 악보 그리고 원하는 가수의 목소리 샘플을 입력하기만 하면, 인공지능이 그 가수의 창법과 음색을 그대로 모사하여 새로운 느낌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작곡하는 인공지능 ‘쿨리타(Kulitta)’는 방대한 악보 데이터와 연주기법 데이터 등을 학습하고, 음계를 재조합하여 새로운 곡을 작곡할 수 있다. 딥러닝 방식을 채택하여 인공지능이 스스로 기존의 악보를 통해 입력된 연주자의 특징과 패턴을 학습하여 새로운 음악구조와 멜로디를 생성해 내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새로 작곡한 바흐의 음악을 일반인에게 들려주면 대부분 인공지능 음악과 실제 바흐의 곡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 일종의 음악 분야의 ‘튜링 테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100명의 일반 청중에게 인공지능 ‘쿨리타’가 작곡한 음악과 인간이 작곡한 음악을 무작위로 들려준 후 그중에서 인간이 작곡한 것을 추측하게 하는 실험이다.

놀랍게도 청중들은 인간이 작곡한 음악보다 ‘쿨리타’가 작곡한 음악을 더 많이 선택했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간이 판단할 때, 인간이 한 것처럼 느낀다면 이 테스트는 통과했다고 보는 것이다.

‘쿨리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쿨리타는 이제 모차르트와 메탈리카 등 이질적인 장르를 초월해서 통합하고 연결하여 새로운 곡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예술 분야에서 인공지능의 활약은 미술이나 음악만이 아니다. 무용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안무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케이팝 댄스, 발레, 현대무용 등 음악과 연결된 다양한 춤동작을 데이터로 학습해서 음악에 최적화된 새로운 안무를 만들어낸다.

최근에는 이 인공지능 안무 알고리즘을 실제로 가수들의 안무에 활용하고 있다. 유튜브 등에서 추출한 춤 동작 샘플에다가 특정 음악의 코드와 박자 등을 입력한 패턴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안무를 창작해 내는 것이다. 

➲ 인공지능은 어떻게 창작하는가?

인공지능은 어떤 원리로 그림을 그려내고 음악을 작곡하는 것일까. 우선 그림을 창작하는 인공지능의 경우, 딥러닝을 통해 엄청난 양의 이미지를 학습한다. 최근에는 이미지를 초고속으로 읽어내는 인공지능까지 등장해서 찰나 단위의 짧은 순간에도 많은 양의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다.

이제 문제는 이미지 데이터의 확보인데, 최근에는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인스티튜트나 메트로폴리탄, 파리 미술관 등에서 많게는 수백만 장 적게는 수십만 장 규모의 이미지 데이터를 공유하고 있다. 이 데이터는 현재 모두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딥러닝은 이 데이터를 학습하고, 스스로 스타일을 분류한다.

즉 학습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흐 스타일, 렘브란트 스타일 등등으로 비슷한 양식끼리 유형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생성적 대립신경망(GAN)’을 통해 학습한 데이터 이미지를 조합해서 가공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인간이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인간이 원하는 그림과 같아질 때까지 인공지능이 완성한 그림의 틀린 점을 인공지능 스스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수정하도록 하면서 최종 완성 이미지를 생성해 내는 능력을 키워주는 시스템이다. 결국 인간의 간단한 터치를 통한 선 하나 긋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인공지능은 고흐나 렘브란트 또는 피카소 풍의 새로운 그림을 완성해 내는 것이다.

인공지능 음악의 생성 원리도 매우 흥미롭다. 우선 악보를 바탕으로 피아노 연주자들이 연주한 곡을 디지털 신호로 변화시켜 모두 데이터로 입력한다. 이때 피아노는 특수 제작된 피아노를 사용하여 건반을 누르는 세기의 정도까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인공지능은 연주자가 각자의 스타일대로 연주하는 모든 움직임을 낱낱이 저장하고 학습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진행과정이 중간에 인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고, 딥러닝이라는 학습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제 이렇게 탄생한 작품을 인공지능의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서부터 그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지까지 새로운 논쟁거리들이 생겨나고 있다. 
 

인공지능은 이제 예술작품 창조를 넘어서 그 작품에 대한 평가 영역까지도 넘보고 있다. 예술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간에 전속된 판단 권한이 부지불식간에 인공지능에게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예술을 비평하고 새로운 화풍과 트렌드를 주도하는 세상을 예상해 보는 일이 그리 유쾌한 상상은 아니다.출처=www.shutterstock.com
인공지능은 이제 예술작품 창조를 넘어서 그 작품에 대한 평가 영역까지도 넘보고 있다. 예술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간에 전속된 판단 권한이 부지불식간에 인공지능에게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예술을 비평하고 새로운 화풍과 트렌드를 주도하는 세상을 예상해 보는 일이 그리 유쾌한 상상은 아니다. 출처=www.shutterstock.com

➲ 인공지능 큐레이터의 등장

인공지능은 이제 예술작품의 창조를 넘어서 그 작품에 대한 평가 영역까지도 넘보고 있다. 이 문제는 매우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 즉 예술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간에게 전속적이었던 판단 권한이 부지불식간에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미술관이나 음악 공연장에서의 큐레이터의 역할을 인공지능이 대신 한다고 하면 어떨까. 단순히 전시회나 공연을 기획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난 행사의 모든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준과 분류에 의해 어떤 작가들을 초청할 지를 인공지능이 판단하는 상황 말이다.

그때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게 될 예술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무엇보다도 우선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라는 질문이 먼저이겠다. 인간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조된 작업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를 들어, 미술가가 작업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 낸다고 했을 때, 만약 인공지능이 스스로 알고리즘을 작동시키는 것을 과연 인간의 예술 창작활동과 동일한 위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냐는 질문이다. 현재로선 매우 당혹스럽고 난처한 물음이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와 수준은 이미 창작의 영역을 파고들고 있다. 처음의 낯섦도 이제 익숙함으로 변해갈 것이다. 인공지능이 일상 속에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인공지능의 존재는 편리함을 넘어서 인간에게 있어서 필수가 되어 간다.

당장 오늘 날씨와 생체리듬에 걸맞은 의상을 제안하는 소극적인 활동에서부터 어느 순간부터는 예술에 대한 미적 가치판단마저도 인공지능이 맡아서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공지능이 예술을 비평하고 새로운 화풍과 트렌드를 주도하는 세상을 예상해 보는 일이 그리 유쾌한 상상은 아니다. 

➲ 인공지능 시대,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은 기억이 만들어낸 창조적 서사이다. 마티스는 ‘예술작품은 어느 개인의 순수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선행했던 문명의 힘이 예술가의 창작을 강요한다’고 말했다. 개인의 삶의 자취와 공동체의 역사 등이 데이터가 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상징하거나 풀어서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창의성 논쟁에 있어서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간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억과 그 재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예술의 고유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아서 단토(Arthur Coleman Danto)는 그의 <예술 종말론>에서 현대의 미술 상황을 다원주의로 규정하면서, 이제 미술사에 특별한 방향이란 것은 없으며, 어떠한 양식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고 파악한다. 인공지능 예술을 기존의 예술사적 관점에서 담아내기에는 그 변화의 폭과 내용이 너무나 크고 다양하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화풍에 대한 이론 작업이 축적되고 나서 인상주의가 예술사의 한 장으로 자리매김하듯이 인공지능 예술도 이 시대에서 당장 어떤 예술사적 의미를 부여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에다 사인해서 내놓은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이 현대 미술사의 방향을 뒤바꿔 놓았듯, 어떤 새로운 혁신이나 혁명도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한다.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삶을 정신적으로 고양해주는 예술은 처음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그 반대로 처음에는 신기해서 경이로움 속에 주목받다가 한순간에 사그라지는 진부한 기술 정도의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일들을 많이 경험해 왔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인공지능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혁 속에서 이미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고, 심지어 그 방향과 내용마저도 주도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마저도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해 버릴 것이라고 지레 절망하고 예술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더 이상 인간은 노래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고 그리기를 그만두어야 하나.

<서구의 몰락>을 통해 잘 알려진 독일의 역사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경고한다. “사람들이 기업활동을 위해 서정시를 포기하고, 기술공학을 위해 그림과 음악을 버린다면, 이것은 인간의 내면적 자살이며, 삶에 대한 전반적 과소평가, 허무주의와 자기소멸을 향한 움직임의 시작이다.” 인공지능의 시대, 오래된 질문이 새롭게 다가온다. 과연 “예술은 무엇인가?” 슈펭글러의 생각을 빌리자면, 예술은 곧 인간의 삶이며, 인간 자체가 아닐까. 인간이 없는 예술과 인간이 없는 인공지능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불교신문3599호/2020년7월18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