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강화 정수사 주지 도림스님

상월선원 천막결사 90일 정진
캠코더로 촬영 결연한 수행현장
영화 ‘아홉 스님’으로 공개돼

길에서 3개월 산 것 같은 고행
어려운 순간마다 방향 제시하고
따뜻하게 살펴준 자승스님 감사

헌신적으로 뒷받침한 외호대중과
뜨거운 응원 덕분에 무사히 성만

사부대중 함께 정진할 수 있는
수행프로그램 만들어 운영할 것

위례 상월선원 천막결사에 동참한 스님들의 목숨 건 정진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아홉 스님’이 코로나 한계에도 2만2300여 관객을 동원해 화제가 됐다. 영화 ‘아홉 스님’이 각광받은 이유는 아마도 결제 중인 선원 일상을 여과 없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선하는 모습을 비롯해 용맹정진 중 장군죽비를 내리치는 모습, 공양하고, 청소하고, 운동하는 스님들 모습이 있는 그대로 공개된 예가 없다. 그런 이유로 ‘아홉 스님’은 관객들에게 불교와 수행, 사부대중이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다.

세계적으로도 실제 스님들이 주인공이 돼 불교수행을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 적도 없어 영화 ‘아홉 스님’은 제작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라 평가될만 하다. 상월선원 천막결사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노력이 숨어있지만, 도림스님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동안거 천막결사에 동참한 스님은 90일간 수행과 일과를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스님이 찍은 방대한 분량의 영상이 없었다면, 다큐 또한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전무후무할 대중 무문관 정진에 동참해, 모든 순간을 기록했던 도림스님을 7월8일 강화 정수사에서 만났다.
 

상월선원 천막결사가 출가 후 첫 철이었다는 강화 정수사 도림스님은 자승스님과 함께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상월선원 천막결사가 출가 후 첫 철이었다는 강화 정수사 도림스님은 자승스님과 함께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결제 내내 촬영을 하면서도 도림스님은 상월선원 천막결사가 다큐멘터리로 제작될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카메라도 결제 당일 천막 안에서 수령해 사용법을 익혔을 정도니 다른 스님들도 마찬가지다. 묵언 시작하기 전 촬영하겠다고 공지한 게 전부고, 그 후로 대중 누구도 카메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천막 안에서 촬영에 대해 필담을 나눌 수도 없었다. 촬영은 오롯이 도림스님의 몫이었다.

“방선시간 자신이 찍은 동영상을 되돌려보며,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좌선하는 스님들의 눈높이에 맞춰 주로 찬 바닥에 무릎 꿇고 촬영을 했다. 입승 진각스님이 회향 죽비를 치는 장면을 담을 때는 긴장도 했다. 내가 못 찍으면 누구도 담을 수 없다는 부담감에 회향 3분 전에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도림스님은 촬영하면서 스님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입재부터 회향까지 전 대중을 카메라 렌즈로 지켜보며, 90일을 한 호흡으로 정진하는 모습에 숙연함마저 느꼈다. 그래서 스님들 한 명 한 명 정진하는 모습을 담는데 최선을 다했다.

“영화를 보고, 사람들에게 획기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제 때 정진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촬영한 예가 없다. 수좌 스님들이 허락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연스럽고 생생한 느낌을 담아내기 어렵다. 어떤 분들이 볼지 모르겠지만, 큰 울림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진하는 모습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진 않아 안타깝지만, 천막 안은 정말 치열했다. 회주 자승스님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선원장 무연스님과 함께 다른 스님 모두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결연했다.”

생애 첫 철을 상월선원에서 지낸 도림스님은 그 안에서 상상하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겨울에 난방하지 않는 천막에서 지내는 것도 힘든데 묵언하며 하루 14시간 정진에 한 끼만 먹고, 씻지 않고 양치질만 하며 옷 한 벌로 90일을 지내는 것까지 어느 하나 쉬운 청규가 없었다. 이 모든 게 중첩되면서 어려움은 극대화됐다. 스님은 야외 한복판에 서서 90일을 산 기분이라며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놀랍게도 천막에서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며칠 지나자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예상보다 더 추웠고, 설상가상 화장실 배관까지 얼었다. 고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러다가 90일을 화장실도 없이 사는 건 아닌지, 양치질마저 못하는 건 아닌지 혼자 걱정을 많이 했다. 배고픔이나 추위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입재한 저녁부터 해제까지 배고픔이 이어졌고, 추위도 마찬가지였다. 씻지 않는데서 오는 불쾌함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군대에서 2~3일 동안 양말을 갈아 신지 않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문득 새벽에 일어나서 그냥 씻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대중 스님들 있어도 개의치 않고 차가운 물로라도 씻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결제 후 우울함이 극대화될 무렵, 도림스님은 새벽에 일어나 다용도실로 갔다. 회주 스님이 벌써 일어나 대중 스님들이 마실 차를 우리고 있었다. 입재 후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가는 도림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회주 스님은 도림스님에게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여줬다. “이제 5일 지났음을 상기시키는 회주 스님의 그 손짓 한 번이 백 마디 말보다 큰 힘이 됐다. 아직 젊으니까 더 힘을 내서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출가자로 살면서 스님에게 상월선원 천막결사 90일은 삶의 변곡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 안에서 스님은 많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연세가 무색하게 치열하게 정진하는 선배 스님들을 보면 절로 숙연해졌다. 무엇보다 결제부터 해제까지 90일을 한결같이 대중을 보살핀 회주 스님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고 스님은 말했다. 도림스님은 회주 스님이 아니었다면 상월선원 천막결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님들이 말씀도 안하지만 표정도 없다. 인상을 쓰지도 않지만 웃지도 않는 대중의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분이 회주 스님이었다. 그 때마다 칠판에 글을 남겨 대중들을 살폈다. 공양하는 방법과 청소하고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자세하게 모든 것을 일러줬다. 영화에서는 칠판 메모 위주로 잠깐잠깐 소개됐지만, 그야말로 24시간 대중 한명 한명의 상태를 챙기는 스님의 보살핌과 가르침이 없었다면 3개월 완주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지식으로서, 우리가 고비를 넘길 수 있게 도와줬다.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진짜 나를 옆에서 지켜보고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도림스님에게 자승스님은 부족한 부분,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한 단계 뛰어넘게 이끌어 준 스승이다. 10여 년 곁에서 시봉하며 종무행정을 하는 모습만 보다가 한 공간에서 수행하고 생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행복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결사는 어떤 수식이나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회주 스님과 함께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 평생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상월선원에서 정진하며 내 스스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부끄러웠고, 혼자 참회도 많이 했다. 살아서 완수해야 된다는 수준이 아니라, 한 단계 뛰어넘어 발전된 수행자가 되고자 더 노력했다.”

감사인사를 전할 또 다른 이들도 있다. 90일간 상월선원을 지켜준 외호대중이다.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맡아 누구보다 생생하게 천막 안 아홉 스님들 모습을 설명했던 스님에게 천막 바깥 외호대중들 모습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특히 총도감 혜일스님이 재현스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꼭두새벽에 성남 봉국사에서 10여분 만에 쏜살같이 달려오는 장면, 시계를 보고 정확한 시간에 공양 배식 목탁을 울리는 모습 등이다.

“그럴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외호대중 한 명 한 명 모두 정진대중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호흡으로 3개월 한철을 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로지 천막만 주시하면서 아홉 스님들을 그야말로 정성을 다해 살피고 있었다는 게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또한 정진대중을 위해 천막에서 함께 기도한 스님과 재가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상월 무문관에서 정진을 무사히 성만 회향할 수 있었던 것은 3개월간 거의 매일같이 보내줬던 사부대중들의 뜨거운 응원덕분이라고 했다.

“법당에서 나오는 염불이나 노래, 음악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초반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나중엔 기도하는 분이나 노래하는 분들이 스님들에게 공양 올린다는 일념으로 쑥스러움을 참고 노래하고 춤을 췄을 것이란 생각에 그저 고마웠다. 익숙해진 후에는 기도소리가 들리면 굽었던 허리가 저절로 펴질 정도로 힘이 났다.”

목숨 걸고 정진하는 스님들을 보며 신심을 내서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 결제 대중은 신도들이 보내는 좋은 기운을 받아 더 열심히 정진하는 선순환의 효과를 보여준 곳이 바로 상월선원이다. 또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즐거운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엄숙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해제 후 스님은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수행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다. 상월선원 결제 후 내린 결론은 불교는 수행하는 종교이고, 스님 혼자가 아니라 불자들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시은에 보답하는 길이란 생각으로 스님은 불자들 대상으로 수행과 상담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계획했던 것들을 실천하지 못해 아쉽지만, 스님은 수행을 통해 불교가 중흥하고, 더 나아가 화합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상월선원 4대 결사를 실천하겠다고 했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불자들도 위안했다. “답답하고 견디기 어렵지만,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인욕바라밀로 이겨 나가자고 말하고 싶다. 덧붙여 이 시국에서 내가 챙기고 표현할 수 있는 감사함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간다면 우울함과 조급함이 상당부분 나아질 것이다.”
 

도림스님
도림스님

■ 도림스님은

정여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93년 쌍계사에서 고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97년 통도사에서 청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해인사승가대학과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조계종 총무원 호법과장, 사서실 사서, 불교중앙박물관 사무국장, 감사국장을 역임했으며 기해년 동안거를 상월선원에서 성만했다. 자운암 주지를 역임했고, 현재 중앙종회의원이며 강화 정수사 주지다.

강화=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홍다영 기자 hong12@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도림스님이 주지 부임 후 중창한 정수사 관음전.
도림스님이 주지 부임 후 중창한 정수사 관음전.

“민족의 영산 마니산에서 상월정신 이어가겠다”

정수사 주지 취임 후 사격일신
매월 음력6일 삼성각 산신기도

강화도 3대 고찰인 정수사는 작고 고요한 가람이다.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에 회정대사가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한 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무학대사의 제자이자, 끽다(喫茶)의 달인으로 불렸던 함허대사가 조선 세종8년(1426년)에 중창했다. 함허대사는 유학자들의 배불에 항거한 당대 선지식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절 뒤에는 스님 부도비가 남아있다.

정수사 대웅보전(보물161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살문을 가지고 있다. 연꽃과 모란, 국화를 화병에 꽂아놓은 조각의 꽃살문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 주심포 양식으로, 정면에는 특이하게 널찍한 마루가 놓여있어 인상적이다. 맑은 날 이 자리에 서서 주위를 내려다보면 절집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마니산 자락에 있어 경내 산신각에서 매월 산신기도도 이뤄진다.

천년고찰 정수사에 6년 전 주지로 부임한 도림스님은 취임 이후 도량정비에 힘을 쏟았다. 노후된 요사채를 증축하고 불자들이 편안하게 신행활동을 할 수 있도록 관음전을 새로 건립하는 등 사격을 일신하는데 힘을 쏟았다. 스님은 특히 지난겨울에는 한국 불교 사상 최초로 진행된 천막 동안거에 결사대중으로 참여해 목숨 건 용맹정진을 무사히 회향했다.

스님은 이제 상월선원의 결사 정신을 정수사에서 꽃피우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구상중이다. 상월선원이 한국불교 전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신앙과 수행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던 만큼, 앞으로 스님의 수행정진 또한 혼자가 아닌 불자들 가까이에서 늘 함께하겠다는 원력이다.

“하루 1000명, 3개월 간 10만 명이상 자발적으로 상월선원을 찾아와 응원해준 대중들에게 큰 감사함을 느낀다. 동안거를 마친 뒤 그 분들에게 어떻게 보답할지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지 고민해 왔다”는 스님은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 현대인들이 부처님 품에서 온전한 휴식과 재충전을 얻을 수 있도록 힘을 쏟겠다는 계획이다.

경전강의와 불교기본교육을 열고 상담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자신이 받은 시은(施恩)을 회향하고 많은 이들의 행복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가꿔 나간다는 원력이다.
 

산신기도로 잘 알려진 정수사 삼성각.
산신기도로 잘 알려진 정수사 삼성각.

홍다영 기자 hong12@ibulgyo.com

[불교신문3599호/2020년7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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