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섬세한 돌부처 표정…비단에 베껴와 새겨”

수닷타장자 되고 싶던 김지성
감산장전에 ‘감산사’ 불사 발심

유가사지론 심취해 미륵보살과
아미타불 조성 가족 왕생 발원

사신으로 중국 당나라 다녀와
장안 불보살상 모본 삼아 불사

불신 대좌 따로 만들어 결합한
8세기 금동불 조성방법과 유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 높이 2.52m, 불상 높이 1.83m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 높이 2.52m, 불상 높이 1.83m이다.

“…용궁(龍宮, 사찰)들이 우뚝 솟아 있고 안탑(雁塔)이 널려 있으며, 사위성(舍衛城)의 경계가 여기에 있고 극락정토와도 가깝다…”
-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명문 일부

중고기(中古期)의 불교식 왕명(王名) 시대가 끝나고 7세기 후반부터 유교적 지배 체제가 시작되지만, 신라인의 불교 신앙은 더욱더 돈독해졌다. 그들은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을 발원한 김지성(金志誠 혹은 김지전)과 같이 신라가 인도의 사위성(쉬라바스티Sravasti)이나 극락정토와 그다지 멀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김지성은 사위성에서 땅과 돈을 기증하여 기원정사(祇園精舍, 제타와나사원, 기수급고독원)를 창건한 제타(Jeta)태자와 수닷타(Sudatta)장자를 본으로 삼아 감산장전(甘山莊田)에 감산사를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였다. 즉 그는 돌아가신 부모님 김인장(金仁章)과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718년(성덕왕 17)부터 사찰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719년에 석조미륵보살입상(이하 미륵보살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이하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였다.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의 존명과 조성 배경은 각각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긴 명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보살상과 불상 조성의 주된 목적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정토왕생이지만, 정치적 후원자로 추정되는 이찬(伊湌) 김개원(金愷元), 자신의 부인과 형제자매들이 속세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보살상과 불상을 조성할 당시 김개원, 김지성의 부인, 형제자매들의 생존 여부에 대해서는 명문의 내용이 모호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즉 미륵보살상 명문의 동생 김양성(金良誠), 사문 현도(玄度, 남자 형제), 누나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이복형제자매(김급한金及漢, 김일동金一憧, 김총경金聰敬, 누이 수힐메리首盻買里) 중에서 김양성, 고로리, 보살상 명문에 없는 누이 고보리(古寶里)가 같은 해에 만든 아미타불상의 명문에서 망자(亡者)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상의 명문에 의하면, 글은 총(聰, 원효의 아들 설총으로 추정)이 짓고 사문 경융(京融)대사와 김취원(金驟源)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의 서체가 다른 것은 다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는데, 다만 누가 어느 상의 명문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720년 4월22일에 김지성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불상 명문의 마지막 부분은 서체, 행(行)의 나열법, 자간(字間)의 크기가 앞부분과 달라 제 3자가 썼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불상 명문에서는 <삼국사기>에서 747년(경덕왕 6)부터 사용된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의 관직을 720년에 이미 죽은 김지성이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시랑이라는 직책이 8세기 초에도 실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747년 이후에야 불상이 완성되거나 명문이 추각되었는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불상의 명문 내용과 같이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을 김지성이 발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 부분.
석조미륵보살입상 부분.

미륵보살상은 하나의 돌로 불신(佛身)과 광배를 만든 다음, 대좌 상대 위의 홈에 발을 끼워 세웠다. 보살상은 8세기 초에 조성된 보살상들과 달리 상당히 이국적인 모습인데, 화려하고 세련된 보관과 영락 장식,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천의 자락, 인도의 도티(dhoti)와 같이 몸에 밀착된 치마 등에서 이러한 특징이 엿보인다.

보살상은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비튼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모든 장엄과 천의 자락도 오른쪽으로 약간 쏠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왼팔을 감고 흘러내린 천의 자락과 광배의 구획선 위로 겹쳐진 천의 자락은 기존의 신라 보살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이다. 

미륵보살상은 반가(半跏), 의좌(倚坐), 교각(交脚)의 전형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입상이라는 점과 관음보살상에서나 볼 수 있는 화불이 보관에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보살상과 같이 입상의 미륵보살은 동인도(東印度)에 그 전통을 두고 있으며, 보관에 화불이 있는 미륵보살상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의 도상적인 배경 속에서 인도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미쳤던 중앙아시아와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 주로 조성되었다.

따라서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조형적·도상적으로 동인도 보살상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동인도는 7세기 후반 당과 신라의 구법승들이 유학했던 곳으로, 현장(玄奘, 602~664)스님도 동인도의 날란사(Nalanda, 나란타)사원에서 계현(戒賢)에게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배우고 돌아왔다. 

아미타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설법인을 결한 채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불상은 기존의 신라 불상에서는 볼 수 없던 이국적인 얼굴과 얇은 법의 위로 드러나는 관능미를 갖춘 몸을 가지고 있다. 유려하게 표현된 크고 작은 법의 주름은 가슴에서 U자로 파도치듯 반복되어 내려오다가 배꼽 아래에서 갈라져 양다리 위에서 다시 U자를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다. 보살상에서도 보이는 광배 옆면의 꽃문양도 신라 불상에서는 처음 보이는 특징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 옆면과 뒷면.
석조미륵보살입상 옆면과 뒷면.

인도풍(風)의 미륵보살상과 관능미를 갖춘 아미타불상을 김지성이 조성하게 된 배경은 신라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는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 서안)에서 실견했을 7세기 말의 보살상과 불상은 감산사 보살상과 불상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 머물 때, 현장이 귀국 후 <유가사지론>을 번역하고 가르쳤던 자은사(慈恩寺)와 랜드마크인 자은사 대안탑(大雁塔)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타불상의 명문에 신라 왕경에 산재되어 있다는 안탑이 대안탑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만큼 당시 신라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사찰과 탑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지성이 심취했던 <유가사지론>(현장 역)의 17지(地) 법문(法門)이 동인도 날란다 사원에서 현장이 계현에게 배웠던 불교 사상인 점을 감안하면, 현장이 조성하고 그의 자취가 남아 있던 자은사를 방문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현존하지 않으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와 <사탑기(寺塔記)>에는 자은사의 법당 벽면을 장엄했던 불상과 보살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아마 감산사 상과 같이 동인도 풍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에 보이는 회화성 짙은 섬세한 표현들은 김지성이 자은사 등 장안의 여러 사원에서 봤던 보살상과 불상을 종이나 비단에 베껴온 것을 모본(模本)으로 삼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보살상과 불상 조성에는 석장(石匠) 외에 금공장(金工匠, 금동불을 주조하던 장인)도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신, 광배, 대좌를 하나의 돌에 새긴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조상과 달리, 미륵보살상은 불신과 광배를 하나의 돌로 만든 다음, 따로 제작한 대좌 위에 끼웠으며, 아미타불상도 불신, 광배, 대좌 상대(윗부분)를 하나의 돌에 조각한 다음, 따로 만든 대좌의 중대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이 정도 크기의 불상은 불신, 광배, 대좌를 하나의 돌에 같이 조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감산사 보살상과 불상은 불신과 대좌를 따로 주조한 다음 결합하여 완성한 8세기 전반의 금동불 조성 방법과 매우 유사하여 금공장의 참여를 추측하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전체 높이 2.75m, 불상 높이 1.74m이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전체 높이 2.75m, 불상 높이 1.74m이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한편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이 김지성에 의해 함께 발원되었다는 이유로 두 존상 간의 도상적인 연관성을 찾으려는 연구가 시도되어 왔다. 감산사 상들이 조성되던 8세기 초, 즉 709년(성덕왕 8)의 이야기인 <삼국유사>권3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의 기록이 그 근거 중 하나이다.

여기에 인용된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 친구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각각 남백월사의 남암과 북암에서 수행하여 노힐부득이 먼저 미륵으로 성불하고, 그의 도움으로 달달박박이 무량수불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8세기 초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감산사 상도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덕왕 때 법상종의 승려 월명사(月明師)가 평소 미륵존상을 신봉하다가 죽은 누이를 위하여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어 동생과 함께 미타찰(彌陀刹,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한 사실은 감산사 상이 조성되던 8세기 전반의 신앙적인 분위기를 대변해 준다. 김지성도 그가 심취했던 <유가사지론>(법상종의 주요 경전)에 의해 미륵보살상을 조성하였지만, 신앙적으로는 신라와도 가까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원하였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불교신문3598호/2020년7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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