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장마 질병 때마다 법회 열어 국난 극복”

가뭄에 하늘만 쳐다보는 것은 소극적 행동이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것은 적극적 대처이다. 우리의 기우제 전통은 엄숙한 불교식·유교식 기우제에서부터 역동적인 민간의 기우제까지 다채로운 방식으로 전승되어 왔다. 그런가하면 가뭄보다 무서운 것이 장마이기에 비가 그치기를 비는 기청제(祈晴祭) 또한 나란히 치러졌다.

가뭄과 장마, 질병과 재해가 있을 때마다 법회를 열고, 삼보의 위신력에 의지해 국난극복의 활로를 모색해온 불교의 역사가 깊다. 재난에 더욱 간절히 부처님을 찾는 것은 영험에 대한 기대보다, 대자대비의 부처님과 일심삼매의 기도가 만나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2016년 거행된 해남 미황사 괘불재. ‘괘불을 모시면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는 마을사람들의 믿음과 함께 전승되어온 의식이다.
2016년 거행된 해남 미황사 괘불재. ‘괘불을 모시면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는 마을사람들의 믿음과 함께 전승되어온 의식이다.

정숙형과 소란형 

나라에서 기우제를 올린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줄기차게 등장한다. 명산·대천과 종묘·사직에서 국행기우제를 올리는 한편으로, 스님들을 모시고 기우도량·용왕도량을 열어 만백성의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나한신앙이 성행했던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나한재를 열어 단비를 염원했으니 기우법회의 역사는 깊고 다채로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숙형 기우제와 달리, 민간의 기우풍습은 놀이처럼 흥겹고 파격적이다. 민간전승의 기우제는 주술적 특성을 지니며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비 오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행위로써 비를 부르는 유형이다. 처마에 물병을 거꾸로 매다는가하면, 삿갓 쓴 이에게 물을 끼얹어 비가 와서 삿갓을 쓴 것처럼 보이게 한다. 또 키를 들고 냇가에 가서 물을 곡식처럼 높이 까불러 하늘에 마중물을 올린다. 

또 하나는 비를 주관하는 천신이나 용왕을 자극해서 비를 내리게 만드는 유형이다. 산꼭대기에 장작과 솔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지피거나, 용바위를 묶어 흔드는 시늉을 하거나, 용소(龍沼)를 막는 등으로 비를 바라는 민심이 신을 위협할 만큼 간절함을 알린다. 불을 지르는 행위에는 양기로써 음기인 비구름을 부르는 음양의 원리도 깃들어 있다. 또 욕 잘하는 아낙네의 솥뚜껑을 훔쳐와, 그녀가 ‘누가 훔쳐갔냐’고 고래고래 욕을 하며 돌아다녀 소란을 피우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신을 자극하는 극단의 처방은 따로 있다. 용이 사는 못이나 기우제단에 피를 묻힘으로써 비를 내려 씻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동물의 피를 뿌리는 것은 물론, 여성들이 집단방뇨를 하거나 장대에 피 묻은 여성속옷을 내걸기도 하고, 이웃마을에서 훔쳐온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워놓고 Y자의 가운데에다 팥죽을 뿌려 생리중인 여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신성공간의 집단방뇨, 훔치는 행위, 부정한 피를 드러내는 등은 기성질서를 파괴하는 반사회적 행위이다. 이러한 파격을 노골적으로 내세움으로써 이열치열의 효과, 곧 강한 부정으로 가뭄이라는 더 극한 부정을 막아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여성의 자궁은 생명의 기운인 물을 상징하는 것이자, 집단방뇨 자체가 큰비를 연상한다. 이 정도면 공동체의 반란에 놀란 천신, 부정한 오염에 기겁한 용왕이 이를 무마시키고자 비를 내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키로 물을 까불려 마중물을 올리는 민간기우제. Ⓒ민속박물관
키로 물을 까불려 마중물을 올리는 민간기우제. Ⓒ민속박물관

괘불을 모신 기우제 

유교식 기우제가 비를 내리는 천신ㆍ용왕께 정성을 들이는 것이라면, 불교의 기우법회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해 비를 청하는 것이기에 그 힘이 더욱 강력하다. 기우법회에서 사용한 경전은 <해룡왕경(海龍王經)> <운우경(雲雨經)>처럼 용왕에게 비를 청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한 사찰만이 아니라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동시에 법회를 열거나, 스님들이 북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불경을 외우는 가구경행(街衢經行)을 함께 행하기도 했다. 가뭄이 극심하여 재난이 큰 만큼 그에 따른 불교적 대처방안도 강렬했던 것이다. 

몇몇 사례를 보면, 고려중기인 1173년에는 가뭄으로 물이 말라붙고 전염병이 만연하자, 명종과 신하들이 평양 보제사에서 용왕도량을 열고 비 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조선시대에도 나라에서 주관하는 기우도량이 100여 년간 지속되어, 1454년에는 “승려를 모아 흥천사 사리각에서 기우하고, 동자를 모아 경회루 못에서 석척(蜥蜴) 기우를 행했다”고 한다. 석척은 도마뱀으로, 용과 비슷한 도마뱀을 병에 넣고 제사를 지낸 것이다. 절에서는 기우법회를, 못에서는 기우제를 동시에 지냄으로써 효험의 극대화를 꾀한 셈이다. 

민간에서는 괘불(掛佛)을 모시고 올리는 기우법회를 갈망했다. 해남 미황사의 괘불재는 ‘괘불을 모시면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는 마을사람들의 믿음과 함께 전승되어온 의식이다. 어느 해에는 기우제를 지낼 때 마른하늘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 괘불 배접이 떨어지고 말았는데, 이를 보수하지 못한 채 1992년 여름에 다시 큰 가뭄이 들었다. 괘불을 걸 수 없는 상태였으나 주민들의 간청으로 할 수 없이 마당에 눕혀놓은 채 기우제를 지내야 했고, 괘불을 모신 다음 어김없이 나흘 동안 비가 내렸다. 

마이산 금당사의 괘불도 기우제와 관련이 깊다. 설화에 따르면 고려 말 나옹스님이 이곳에서 수행 중이었는데, 어느 해 가뭄으로 논밭이 타들어가자 주민들이 스님을 찾아와 애원했다. 스님은 기우제를 올리자고 한 뒤 호랑이를 타고 사라졌다가, 사흘 뒤 홀연히 나타나 절의 뒷마당을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자 한 폭의 괘불이 나와, 괘불을 모시고 기우제를 올리자 단비가 쏟아졌다. 지금의 괘불은 300여 년 전에 제작된 것이지만, 그 뒤로 가뭄이 심할 때면 금당사 괘불을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온다고 한다. 
 

2015년 오대산 금강연에서 올린 월정사 기우제. Ⓒ평창군청
2015년 오대산 금강연에서 올린 월정사 기우제. Ⓒ평창군청

용띠 스님들의 반란

운문사 스님들은 절 옆의 이목소(璃目沼)에서 다채로운 기우제를 올린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학인 가운데 용띠 스님들이 제관이 되어 기우제를 지내는데, 숫자가 모자라면 뱀띠 스님들도 제관에 포함됐다. 이들 스님이 제물을 장만해 제상을 차리는 일에서부터 법주와 바라지 등에 이르기까지 의식을 도맡아 진행하게 된다. 기우제를 지내는 날이면 목욕재계하고 저녁예불을 마친 다음, 모든 대중 스님이 이목소로 향한다.

정성껏 차린 제상에 촛불을 밝혀놓고 ‘국태민안 우순풍조(國泰民安 雨順風調)’를 발원하는 기우법회를 올리는 것이다. 운문사의 한 스님은 강원일지에, 이때 “대중 스님들은 한결같이 용왕대신을 부르며 마음속으로 ‘옴 주룩주룩 사바하…’ 폭우진언 108편을 외웠다”고 적었으니, 스님들의 유머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염불을 마치면서 기우제는 역동적인 방식으로 전환된다. 용띠와 뱀띠 스님들이 준비해온 솥뚜껑을 두드리며 일제히 이목소에 뛰어들어 한바탕 소란을 연출하는 것이다. 쇳소리를 내며 비를 주관하는 용왕에게 한목소리로 호소하니, 어지간하면 용왕이 비를 내려줄 만하다. 

이목소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된 내력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신라 말의 보양(寶壤)스님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는 바닷길에, 서해용궁에 가서 불경을 설했다. 이에 용왕은 금란가사를 시주하고 아들 이목(璃目)을 함께 보내어 스님을 모시도록 했다. 이목은 운문사를 중창한 보양스님과 함께 절에 살면서 남몰래 법의 교화를 돕고 단비를 내리는 일도 맡았다. 1000년이 넘도록 도량을 지키니 소의 이름도 ‘이목소’라 부르며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몇 해 전에는 인근의 은해사 백흥암에서도 소란형의 약식 기우제를 지냈다. 그해 심한 가뭄이 들자 용띠 스님들이 공양간의 그릇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기고, 다른 스님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도량을 돌았다는 것이다. 모두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을 때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수 없다는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풍습들이다. 축제적 종교의식으로써 공동체의 화합을 다지고 위기감을 완화시키는 심리적 대처의 의미도 크다. 
 

1994년 밀양 호박소에서 올린 기우제. Ⓒ산소탱크
1994년 밀양 호박소에서 올린 기우제. Ⓒ산소탱크

기청제와 보사제

‘칠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말처럼 가뭄보다 무서운 것이 장마이다. 여름비는 길게 이어져 피해가 크기에 장마를 고우(苦雨)라 불렀다. 입추를 지나서도 장마가 계속되면 날이 개기를 빌며 기청제(祈晴祭)를 지낸 기록이 고대부터 등장한다. 왕조시대에는 자연재해가 왕에게 덕이 부족한 탓이라고 보았다. 이에 왕이 직접 기우제와 기청제를 올리며 천지신명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물론, 삼보의 큰 힘에 의탁코자 스님들을 모시고 법회형식의 제의가 이어졌다. 

인조는 기청제의 제문(祭文)에서 “소자가 변변치 못해 노여움을 산 것인데 죄 없는 백성들에게 어찌 이리하십니까. 부디 미천한 정성을 살펴, 음기를 몰아내고 해를 뚜렷이 보여 만백성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소서”라며 간절히 빌었다. 긴 장마가 든 1778년의 어느 여름날, 정조는 사대문에 기청제를 지내도록 명하며 “제가 거듭되다보면 재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해이해질까 염려된다. 더구나 지금 음산한 비가 그쳤다가 다시 내리니, 더욱 조심하고 정성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이처럼 국행기청제는 주로 숭례문·흥인문·돈의문·숙청문의 사대문이나 종묘에서 사흘간 지내고 그래도 개지 않으면 거듭됐다. 기청제를 지낼 때면 북문인 숙청문을 닫고 남문인 숭례문을 열며, 기우제에서는 북문을 열고 남문을 닫게 된다. 북쪽은 음(陰)이고 남쪽은 양(陽)이니 물과 불, 비와 햇볕을 상징하는 문을 때에 맞도록 여닫았던 것이다. 또한 기우제·기청제를 지내어 감응이 따르면 감사의 뜻으로 보사제(報謝祭)를 올리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뭄과 장마가 들 때면 전국의 사찰마다 스님들의 기도가 울려 퍼졌다. 여름비가 고통스러운 고우가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처럼 윤택한 택우(澤雨)가 되기를, 가뭄 끝의 달고 단 감우(甘雨)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이다. 

[불교신문3597호/2020년7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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