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이나 현실도피 아닌
점철된 욕망 무시할 힘 필요

혜인스님
혜인스님

마음의 소리를 듣는 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바쁘게 얽혀 있는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 두텁게 점철된 욕망을 무시할 수 있는 용기. 주어진 기대와 책임에 눈감을 수 있는 용기. 진실을 덮는 시끄러운 소음들 속에서 고요한 마음의 소리를 기다릴 수 있는 용기.

무책임이나 현실도피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때로는 책임감 있게 현실을 직시한다는 명분 아래 현실에 파묻히고, 책임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건 아닌지. 부담스러운 현실을 누군가에게 자연스레 전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내가 나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좀 무시해 봐도 괜찮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럴 용기가 없어서 주어진 기대와 책임에서 도망쳐왔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여기까지 와 버린 건 어수선한 세상과 복잡한 마음 속 희미하게 들리던 마음의 소리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어쩜 그리도 말이 없고 조용한지, 한없이 화려하고 커다란 것들 속에서도 너무나 선명하던 희미하고도 고요한 소리.

수많은 풍파 가운데에서도 아무런 미동 없이, 너무 조용하고 또 얌전해서 오히려 가장 눈에 띄는, 가장 귀를 사로잡는 소리. 그 웅장한 고요함이 커지는 만큼 나는 용감해진다. 용감하게 이별하고, 용감하게 꿈을 접고, 용감하게 걸어 나온다. 그 고요함에 사로잡혀서 나도 모르게 발휘된 용기로 많은 것들을 포기해오는 동안 여전히 미동 없이 얌전하고 고요하기만 한 그 소리.

힘내라는 위로나 괜찮다는 격려 따위는 없는 그 소리를 마주하면 거짓말처럼, 사라진 줄 알았던 힘과 용기가 솟아난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블랙홀에서 무엇보다도 큰 힘이 발휘되는 것처럼. 그 웅장한 고요함을 마주하는 만큼 이미 다한 줄 알았던 힘과 용기가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듯 다시 일어난다.

다시 일어난 마음은 소리친다. 힘들다고. 아직 괴롭다고. 그러니 멈출 수 없다고. 그 고요한 용기를 놓칠 수 없다고. 그러다 지금 하고 있는 기도라는 것도, 수행이라는 것도 버려질 거라고. 승복도 삭발한 머리도, 언젠간 ‘나’도 그 고요함도 다 버려질 거라고. 기다리는 만큼, 버려지는 만큼 용기는 더 커져, 비워지는 만큼 더 선명해질 거라고.

그래야 비로소 고요함은 나를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진공(眞空)만이 아무런 말없이 묘유(妙有)를 품을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훌륭하고 거대한 존재도, 아무리 하찮고 미세한 존재도 결국엔 스러져 버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면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그 고요함을 마주할 수 있는 만큼만 내가 용감해지는 거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다가오는 순간엔 더 용감해지겠다거나 덜 용감해지지 말자는 바람 같은 건 없다. 그저 고요함은 텅 빈 만큼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일으켜 낼 뿐. 그렇게 마음의 소리는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여 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다.

비어있기에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고요함이여. 나는 그만큼씩 기도하는 사람이다. 천일만큼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고, 텅 빈 고요함이 품을 내어주는 만큼, 덕분에 다시 일어나는 용기만큼 기도하는 사람. 아니, 기도하는 사람도 아니고 고요해지는 사람, 용감해지는 사람이다.

용기가 없어서 도망쳐온 자리는 그만큼 다시 비워질 거다. 내가 고요한 마음의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을 때 그 자리는 다시 채워질 거다. 고요함으로. 너무도 얌전하고 조용하게, 그래서 더 눈에 띄고 귀를 사로잡게.

[불교신문3597호/2020년7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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