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있다는 망상, 버려야 할 산냐

‘내가 있다’는 의식 견고하면
몸 느낌 생각마저 나라고 착각
금강경은 망상 여의라고 강조

등현스님
등현스님

<금강경> 17장에서는 보살이 7가지 산냐를 여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초기불교의 샨냐를 다루는 수행과는 어떠한 일치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산냐는 여섯 감각 대상들에 대한 여섯 가지 인지작용이고, 촉을 연으로 하여 발생한다. <삼킴의 경(S. III. 87)>에서 부처님은 색을 인식하는 예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상을 정의한다. “비구들이여, 왜 산냐라 하는가? 인식한다고 해서 산냐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인식하는가? 푸른 것도 인식하고 노란 것도 인식하고 빨간 것도 인식하고 흰 것도 인식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인식하므로 산냐라 한다.” 

여기서 산냐의 인지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몇몇 선제 조건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파란색, 노란색 등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그가 이미 파란색과 노란색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가 그러한 색들을 이미 알지 못했다면, 그는 대상들을 “이것은 파란색이다, 이것은 노란색이다”라고 인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인식 이전에 선험적 기억이 없으면,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파랑, 노랑”이라는 용어들은 사실 “이름”과 “개념”이고, 이것이 산냐인 것이다.

상은 일반적으로 건전한 상과 불건전한 상의 2가지가 있다. 불건전한 상은 “경험의 주체인 자아가 있다”라는 망상(papañca)이다. 금강경에서 버려야 하는 샨냐는 주로 불건전한 산냐를 말한다. <마두삔디까(Madhupiṇḍika)경>에서는 산냐가 어떻게 왜곡되며, 오염된 인식과정이 빠빤짜(papañca)라는 망상으로 발전하는지를 설명한다.

인식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단계는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안식)가 일어나고, 이 셋의 화합이 접촉이며,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난다”라는 부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일반적인 연기 공식처럼 “~을 조건으로 ~이 일어난다”라는 비인격적인 형식이다. 

두 번째 단계는 “느낀 것을 인식하고 인식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사량 분별하고”라는 과정인데, 이 단계에서는 앞의 단계와 달리 동사가 3인칭 단수 형태이다. 즉, “~을 조건으로 ~이 일어난다”라는 비인격적인 자연스러운 일어남의 형태에서 “~한 것을 ~한다”라는 인격적인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아의식이 활성화하는 단계로 이해되어진다.

세 번째 단계는 “사량 분별한 것을 원인으로 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눈으로 알아지는 형색들에 대해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가 사람에게 일어난다”라는 부분이다. 이 단계는 이와 같은 인식과정에서 발생한 사량분별 (빠빤짜, 자아의식, 망상)이 확대되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자아의식으로 사량 분별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모든 행위의 주체자로서 집착될 만한 어떤 자아가 있다”라는 잘못된 자아에 대한 생각이 “느낌”의 단계에서 일어난다. 

즉 느낌이 의존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것을 느끼는 자가 있다”라고 바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거기에 어떤 고정된 “느끼는 자”는 없고, 다만 조건 따라서 “느낌”이 일어났을 뿐이다. 이처럼 “느끼는 자가 있다”라는 생각은 인식과정을 거쳐서 빠빤짜라는 단계에서 더욱 견고해진다. 즉 “내가 있다”라는 자아의식이 견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잘못된 자아의식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고 인식하면서 사는 것이다. 빠빤짜의 단계에서 견고해진 자아의식은 무언가 그것이 대상으로 할, 자아라고 할 만한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찾게 된다. 이 때 이 자아의식을 오온 중에 하나와 혹은 오온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이 몸이, 이 느낌이, 이 생각이, 이 의지작용이, 이 의식이 나다”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혹은 “이런 모든 몸과 마음작용들의 합이 나다”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은 이와 같은 착각 과정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etaṃ mama)”, “이것이 나이다(eso’ham asmi)”,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eso me attā)”라는 세 가지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보살이 4상을 여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모두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불교신문3597호/2020년7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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