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광당 종산대종사 추모 특집’
혜광당 종산대종사 발자취


의대 졸업 후 친구 죽음 계기
49재 염불소리 듣고 출가 발심
43년간 전국 선원에서 안거 성만

동산, 경봉, 금봉, 청담스님 문하
경전 탁마하며 참선 수행 매진
천축사서 6년간 무문관 정진
“계율은 외는 것이 아닌 실천”

1980년대 후반 종단소임 시작
2004년부터 8년간 원로회의 의장
“종단 법계 세우고 승풍 진작”

혜광당 종산대종사. ⓒ불교신문
혜광당 종산대종사. ⓒ불교신문

조계종 6대, 7대 원로회의 의장을 지낸 화엄사 조실 혜광당(慧光堂) 종산대종사(宗山大宗師)가 6월23일 새벽 5시30분 청주 보살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납 72년, 세수 97세. 영결식 및 다비식은 6월27일 화엄사 다비장에서 종단장으로 엄수됐다.

종산대종사는 1924년 10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동진, 법호는 혜광, 법명은 종산이다. 광주의과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의사가 아닌 수행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친구 49재를 지내는 강진 만덕선원에서 염불소리를 듣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는 스님은 만덕선원에서 도광스님을 친견하고 육신을 치료하는 의사보다는 마음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부모의 상심은 컸겠지만, 스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도광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49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54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53년 강진 백련사 만덕선원 전강스님 문하에서 안거를 성만한 이래 스님은 43여 년간 대흥사, 통도사, 해인사, 천축사 무문관, 용주사 중앙선원 등 전국 선원에서 정진했다. 대강백 용봉스님 문하에서 경전을 공부했고, 당대 선지식으로 추앙받은 전강스님으로부터 선을 배웠다. 또 동산스님, 경봉스님, 춘성스님, 금봉스님, 청담스님 등 선지식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58년 해인사에서 정진하던 어느 날, 조실 금봉스님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고 ‘선방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금봉스님은 “선(禪)! 선! 어떤 것이 선이냐?”고 외치면서 염주를 들어 보였고, 스님은 “진심(眞心)이 선입니다”라고고 답했다. 금봉스님은 한참 선문답을 한 후 <보장록>을 주며 ‘혜광’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이후에도 종산스님은 일평생을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如何是父母未生前 本來面目)’라는 화두를 챙겼다.

“수행자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정진이고, 정진 말고는 달리 할 게 없다”는 생각으로 스님은 철저히 수행에 매진했다. 동산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범어사에서 정진할 때 일이다. 도반 3명과 “깨닫지 못하면 밖으로 나가지 말자”고 결의하고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널빤지에 못을 박아 뾰족한 쪽이 앞으로 향하게 세워놓고, 참선을 했다.

잠깐이라도 졸면 못에 찔리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20여 일이 지났을 무렵, 스님은 못에 긁히고 찔려 피가 군데군데 엉겨 붙어있던 도반의 이마를 봤다. “저 스님은 피가 흘러도 개의치 않고 정진하는데, 나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아보며 “여기서 꼭 깨달아 나가야겠다”는 대분심, 대의정, 대발심을 일으켰다. 장좌불와와 용맹정진을 반복하며 스님은 마침내 천축사 무문관의 6년 수행 끝에 문이 없는 방의 벽을 걷어차고 세상으로 나왔다.

종산스님은 일종식을 하고 오신채를 먹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젊은 수좌시절 금봉스님을 만나기 위해 해인사로 가던 길, 대구에 이르러 스님은 시장기를 느꼈다. 칼국수라도 먹을 생각으로 음식점을 찾던 중 불고기 냄새가 스님을 자극했다. “계율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그날따라 불고기 냄새가 얼마나 좋던지 깜짝 놀랐다”는 스님은 그 순간 자신에게 물었다고 한다.

“평소 네가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정진을 했는데 오늘따라 고기 냄새가 좋으냐? 만약 고기를 준다면 먹겠느냐?” 아니라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는 스님은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저 고기가 전생의 너의 어머니라고 한다면 먹겠느냐? 그것도 전생의 어머니가 못된 중생들에 의해서 살생을 당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예리한 칼로 살을 베어 뜨거운 불에 구워지는데 그래도 먹겠느냐?” 그렇게 ‘불고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는 스님은 입적하기 전까지도 청정하게 계율을 지켰다. 

스님은 법문을 하지 않았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조실 경봉스님과 구하스님을 모시고 정진할 때 결심한 바를 실천한 것이다. 당시 종산스님은 입승소임을 맡았는데, 해제를 3일 앞두고 경봉스님이 대중방에 와서 “해제법문은 입승이 하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갔다. 극구 사양했지만 경봉스님은 “두말하지 않는다”고 단칼에 잘랐다.

결국 해제 날 종산스님이 법석에 올랐다. 그리고 며칠 후 한 스님이 “스님은 수행하려고 이곳에 왔습니까, 조실 인가를 받으러 왔습니까” 하며 시비 섞인 질문을 던졌다. 어리석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 스님은 그 길로 걸망을 싸서 해인사로 가며 ‘앞으로 법석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정진과 지계를 우선한 대종사는 후학들에게 “계율은 머리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먼저 내 허물을 보고 참회하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 계율은 목숨처럼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망상을 버리고, 수행 정진해야 한다. 수행이 안되고, 반야지(般若智)를 열지 못하면 시비(是非)가 일어난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용맹정진하면 반야의 지혜가 열리고 그 지혜를 지닌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장의 불만불평이 없어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한편으론 전법과 포교의 책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개심사 주지와 1988년 조계종 중앙종회 임시의장, 법제의장을 역임했으며 1990년 보살사 직지선원 조실로 주석했다. 2000년 4월 천은사 방장선원 조실, 2002년 10월 구산선문 태안사 원각선원 조실, 2012년 1월 화엄사 선등선원 조실로 추대됐다. 1997년 조계종 최고의 의결기구인 원로회의 의원이 된 후 2004년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 받았다. 또 2004년 원로회의 의장으로 선출돼 2012년까지 역임하며 종단의 위계를 바로 세우고 승풍을 진작시켰다.

70여년 수행자로 살며 이사를 두루 갖춰 후학들의 지남이 돼 준 종산대종사는 6월23일 오전5시30분 청주 보살사 직지선원에서 원적에 들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사진=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 임종게

忽然惺時在夢中(홀연성시재몽중) 
今日頓覺羞恥麼(금일돈각수치마)
了知柱草心印華(요지주초심인화) 
不拘廉恥又欲見(불구염치우욕견)

문득 깨어보니 이번에도 잠깐 졸았구나. 
부끄럽게도 왜 지금에서만 아는가!
다행히 기둥에 난 풀도 
사람마음 꽃인걸 알아서 
염치없지만 또 보고싶겠네!


◼ 49재 일정

 초재 6월29일 10시 구례 화엄사
  2재 7월6일 10시 구례 화엄사
  3재 7월13일 10시 청주 보살사
  4재 7월20일 10시 구례 화엄사
  5재 7월27일 10시 곡성 태안사
  6재 8월3일 10시 구례 화엄사
  7재 8월10일 10시 구례 화엄사

[불교신문3596호/2020년7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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