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흥당 백운대강백 추모 특집’
백운스님이 42세 쓴 ‘출가기’
1976년 12월 불교신문 기고

젊은 시절의 백운스님. ⓒ불교신문
젊은 시절의 백운스님. ⓒ불교신문

“교학(敎學) 익히며 참선(參禪)하고 참선하며 경론(經論)을 익히는 자세라야 가장 온당하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권하고 싶다.” 6월19일 입적한 대강백 백운(白雲)스님이 화엄사 강원에서 학인을 지도하던 시절에 직접 쓴 ‘출가기’에서 참선교학을 병행하며 수행할 것을 후배 스님들에게 당부했다. 이때 스님의 세수 42세였다.

이 같은 사실은 백운스님이 1976년 12월26일자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에 게재한 ‘출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백운스님은 “선(禪)은 불심(佛心)이요 교(敎)는 불어(佛語)란 말씀을 아는 이는 많다”면서 “(하지만) 이를 실천수행에 옮기는 이가 적은 것은 참선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지만 금생에 못하면 내생에라도 꼭 해야 할 일은 참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렇지만 참선한답시고 교학을 배격하는 것도 금물”이라고 참선수행과 교학연찬을 함께하며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이 글에서 백운스님은 한국전쟁 때 세 차례나 사형장에 끌려가고, 휴전 직후 늑막염으로 8개월이나 고생하며, 1960년대 초반에는 급성맹장염과 교통사고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부처님 가피력으로 이겨냈다는 밝혔다. 스님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두가 부처님의 가호지력으로 위기를 극복한 셈”이라면서 “특히 6·25 동란은 나를 재입산 시켜준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백운스님은 단명하지 않으려면 절에 들어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권유 때문에 강진 화방사로 ‘첫 출가’를 했다면서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흘린 적도 여러 차례라고 고백했다.

“화방사는 산높이 자리하고 있어서 멀리 내려다보는 맛이 좋아서 썩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낮에는 잘 놀았지만 밤에는 어머니가 그리워서 혼자서 울기를 자주 하였다. 어머니가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어느날 달밤에는 산 아래까지 혼자서 내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이밖에도 백운스님은 어린 시절 예불을 하면서 육군대장이나 해군대장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실도 밝혔다. 스님은 “잇따른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는 시기여서 어린 내 가슴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인물은 대장인 것으로 알았던 것”이라면서 “그러나 대장은커녕 졸병노릇도 못해보고 산사(山寺)에서 중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 당시를 회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고 순박했던 시절을 돌아보았다.

범어사, 화엄사, 송광사에서 강주를 지내고 <불교신문>의 고승일화 공모전에서 두 차례나 당선하는 등 교학과 ‘글쓰기’에 뛰어났던 스님이지만 간화선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러나 스님은 참선과 교학을 병행하며 수행정진해야 한다는 점을 후배 스님들에게 당부하며 글을 맺었다. 평생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한 백운스님의 솔직 담백한 출가기는 지금의 스님들뿐 아니라 재가불자들에게도 한 줄기 ‘법의 향기’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백양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1976년 당시 화엄사 강사 백운스님의 ‘출가기’ 전문

“교학 익히며 참선하고, 참선하며 경론 익혀라”

내가 처음 절에 간 것은 5세 때였다. 내 사주(四柱)에 단운명(短運命)이 들어 있으니 절물을 먹어야 명(命)을 이을 수 있다 하여 부모님들은 나를 절로 보낸 것이었다.

그러니 나의 처음 입산(入山)은 무상(無常)을 절감한 것도 아니요 불교의 교리를 다소나마 이해하여 출발한 것도 아니며 순전히 타의(他意)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나를 키워준 강진군(康津郡) 군동면(郡東面) 소재의 화방사(華芳寺)는 산 높이 자리하고 있어서 멀리 내려다 보는 맛이 좋아서 썩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낮에는 잘 놀았지만 밤에는 어머니가 그리워서 혼자서 울기를 자주 하였다. 어머니가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어느날 달밤에는 산 아래까지 혼자서 내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이러구러 몇 달을 지낸 뒤, 스님께서는 저녁예불 끝에 부처님께 절을 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한밤중에 이르도록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빌었다. “부처님, 육군대장이나 해군대장 되게 해주십시요.” 그 당시는 일로전쟁(日露戰爭)과 만주사변(滿洲事變)·중일전쟁(中日戰爭) 나아가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등 잇따른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는 시기여서 어린 내 가슴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인물은 대장인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장은커녕 졸병노릇도 못해보고 산사(山寺)에서 중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 당시를 회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나는 이렇게 예배를 많이 함으로 해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득(得)을 보았던 것 같다. 그 첫째는 몇 시간씩 절을 하고 나서는 밤중에 깨어나 어머니를 찾으며 보채지 않았으니 나를 길러준 어른들께 폐를 덜 끼쳤을 것이요. 둘째는 예불(禮佛)의 공덕(功德)으로 명을 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내가 단명(短命)한 운명(運命)이라는 것은 나이 들면서 더욱 뼈저리게 실감(實感)한다.

6·25때 공산도당에게 잡혀 사형장엘 세 차례나 끌려 갔었고, 그 다음해에는 늑막염으로 8개월이나 고생했으며 61년과 64년에는 급성맹장염과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두가 부처님의 가호지력으로 위기를 극복한 셈이지만 특히 6·25 동란은 나를 재입산 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9세 때 화방사(華芳寺)를 나와 고향으로 가서 소학교 2학년에 들어간 나는 6·25때까지 학교에 다녔었다. 

동란 중에 나는 공산도배에 아버지를 빼앗겼고 나도 여러차례 붙잡히기도 하면서 간신히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는데 그 때 산에 숨어 지내면서 이렇게 맹서하며 발원하였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 다행히 이 몸을 구원해 주신다면 다시 청산으로 가서 중노릇 잘 하겠나이다.”

그래서 나는 6·25 다음해에 학업을 중단하고 재입산(再入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중노릇은 경론을 이수하여 불교학자가 되는 것이 최선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조사어록과 경전을 배우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얼마 안가서 책을 멀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사어록(祖師語錄)을 통해 선(禪)을 이해하게 되자 참선(參禪)하는 길만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하는 첩경임을 알았으니 말이다. 

내가 소위 수좌(首座)가 되어 선원(禪院)으로 전전하게된 것을 나는 세 번째의 출가(出家)로 여기고 있다. 5세 때 첫 출가나 6·25때 재출가도 중요하지만 선방(禪房)으로 가게 된 세 번째의 출가야 말로 내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요즈음에 나는 비록 강석(講席)에 머물고 있지만 참중노릇은 참선수행(參禪修行)에 있다는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수 없는 지상(地上)의 과제(課題)이다. 나는 후배 스님들께 특히 이 점을 강조한다. 

선(禪)은 불심(佛心)이요 교(敎)는 불어(佛語)란 말씀을 아는 이는 많아도 이를 실천수행(實踐修行)에 옮기는 이가 적은 것은 참선(參禪)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지만 금생(今生)에 못하면 내생(來生)에라도 꼭 해야 할 일은 참선(參禪)이다. 

그렇지만 참선(參禪) 한답시고 교학(敎學)을 배격하는 것도 금물(禁物)이다. 교학(敎學) 익히며 참선(參禪)하고 참선하며 경론(經論)을 익히는 자세라야 가장 온당하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권하고 싶다. 
 

1976년 12월 불교신문에 게재된 ‘백운스님의 출가기’.
1976년 12월 불교신문에 게재된 ‘백운스님의 출가기’.

[불교신문3594호/2020년7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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