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빌미로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싸울 것인가”

불교상담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이야기다. 임인구의 새 연재물 ‘어엿한 그대’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마음이, 또 그 마음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온전한지를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어엿하게 서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연기법에 근간하여 역설과 상호관계성의 원리로 안내한다.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고 마음 자체를 친구처럼 또는 연인처럼 대하는 직접화법으로 구성된다.

임인구
임인구

어느 날, 카프카는 그대를 떠올렸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대의 아픔을 떠올렸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대에게 닿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대여, 그대는 이 시대의 그레고리다.

그대는 이미 자신을 벌레처럼 느끼고 있다. 자신이 잘못된 존재인 것만 같다.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그대가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탐독하며, “괜찮아! 지금의 나로도 괜찮아!”라는 무한한 자기긍정의 말들로 자신을 무장하려 하는 이유는, 그대가 이미 자신 안에 가득 자리잡은 수치심을 눈치채고 있는 까닭이다.

그대는 벌레다. 가족들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동료들 앞에서, 연인 앞에서, 사회 앞에서, 그대 자신은 수치스럽기만 하다. 그들 앞에서 그대는 늘 당당하지 못하고, 어딘가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생각된다. 그대는 그들의 수치다.

그대의 느낌이 언제나 정확하다. 그대가 속한 세계의 선량한 이들이 설령 그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대는 부정할 수 없이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 느낌을 아무리 애써 떨쳐보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대는 자신을 벌레로 느끼고 있었고, 그 느낌은 그대를 둘러싼 선량한 이들 또한 그대를 벌레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대의 착각이 아니다. 그들은 그대를 벌레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그대도 자신을 벌레로 느끼고 있었다.

그대는 언제나 이방인이고, 또 이단아였다. 부모가 원하는 것처럼 착한 아이로 살지 않았고, 사회가 원하는 것처럼 성실한 납세자로 살지 않았으며, 연인이 원하는 것처럼 희생하는 구원자로 살지 않았고, 국가가 원하는 것처럼 민주 시민이라는 이름의 한 표로 살지 않았다.

그대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유교적 덕목을 수호하지도 않으며, 활력이 넘치는 사회의 역군이 되지도 않고, 온라인 게임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대는 대한민국을 빛내는 천만 관객의 한 사람에 속하지도 않고, 독립영화관을 자주 찾지도 않으며, SNS 스타의 영광에 감동받지도 않고, 개인방송 채널을 열지도 않는다.

그대는 사실 그러한 것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대는 술먹고 주정부리는 아빠에게도 관심이 없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위하는 엄마에게도 관심이 없다. 진보언론인의 뜨거운 냉소에도 관심이 없고, 가스통 할아버지들의 차가운 고집에도 관심이 없다. 또한 그대는 짜장면에도 관심이 없고, 짬뽕에도 관심이 없다. 근본주의에도 관심이 없고, 다원주의에도 관심이 없다.

그대는 그 모든, 강요된 흑백사고에, 종용된 진영논리에, 강제된 대결구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인간이면 모름지기 보다 본질적인 어느 한쪽의 입장을 택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그 치열한 노력이 변증법적인 역사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이와 같이 살지 않는 이는 건강한 시민으로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비겁자라고 그대에게 설파하는 그 모든 근대적 이원론의 폭력에 진실로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대는 근대의 시민이 아니라, 현대의 실존이다. 그대는 현대인이다. 그대는 “왜?”라며 의미의 문제를 물을 수 있게 된 현대인이다. 그래서 그대는 오직 단 하나밖에는 관심이 없다.

삽화=손정은
삽화=손정은

“왜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있는 나인가?”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지금 삶이 펼쳐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오직 그 일밖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는 정말로 알고 싶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그대 자신의 의미를.

그대는 정말로 알고 있다. 그 모든 이원론의 대답 중 어느 것도 그대에게 정말로 그대 자신의 의미를 알려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대여, 그대는 그저 그대 자신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대 자신을 알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이기를 종용하는 그 모든 이원론의 세력들 앞에서,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대 자신임을 드러냈던 것뿐이다.

그렇게 이원론을 거부한 그대는 그 대신에 언제나 이방인이고, 또 이단아였다. 그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의 빛을 따르지 않으며, 오롯이 그대가 누구인지를 비추는 그대 자신의 빛에 따라서만 항해하는 삶의 여행자였다.

그래서 그대는 벌레였다. 모든 이원론의 세력들 앞에 그대는 필연적으로 벌레였다. 모든 이원론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간은, 애초 통제불가능한 삶을 언어를 통해 임의로 분절함으로써, 좀 더 통제할 수 있는 모습처럼 삶을 가공하여 가상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곧, 이원론의 현실은 안정을 추구해온 인간이 발명해낸 가상현실과도 같다.

그리고 이 가상현실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은 바로 상반되는 언어들의 대립과 갈등이다. 마찰은 열에너지를 발생시킨다. 단순한 물리학이다. 그래서 이원론의 현실은 늘 하나의 언어적 입장을 택해 상대편과 대립하는 갈등의 반복을 통해 그 구조가 존속된다. 그리고 이 언어적 대립이 계속 유지되어야 할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해, 대립은 역사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숭고한 기치를 내건다.

그대여,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이원론이 낳은 근대의 망령이다. 안정을 얻기 위해 끝없이 적을 만들어 싸워야 하는, 너무나도 역설적인 가상현실의 구조다. 전체주의는 그대가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 그대 자신의 의미는 전체주의의 관심사가 결코 아니다. 전체주의는 오로지 전체주의라는 구조 자체의 유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때문에 이러한 전체주의의 현실 속에서 그대는 늘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소외된 그대의 이름이 바로 벌레다. 그대의 가족, 친구, 동료, 연인, 사회 등을 위시한, 구조의 안정적 유지만을 꾀하는 전체주의의 가상현실에 동의하여 살아가는 그 모든 선량한 이들 앞에서, 그대는 언제나 벌레다.

그대여,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실존주의의 문제다.

그대는 현대의 실존이다.

그대는 진실로 근대적 이원론이 만들어낸 전체주의라는 구조의 유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망령과 같은 관념적 구조에 봉사하는 일은 그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대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닌 몸이다. 구조가 아닌 삶이다. 그대는 매트릭스와 같은 가상현실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태어난 소모품으로서의 도구가 아니고, 늘 당위적 책무로서 처절하게 누군가와 싸워야만 하는 발할라의 각본을 수행하기 위해 태어난 삼류연극의 배우가 아니다. 

그대는 전체주의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그대의 면모, 바로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대 자신이 대체 누구인가를 알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대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대는 정녕 현대의 실존이다. 그리고 이 현대의 실존은 근대의 망령이 보기에는 벌레처럼 너무나 불순하고, 불결하며, 불경하기까지 한 것이다. 실존은 언제나 하나의 구조가 아무리 거대하고 완벽한 구조일지라도, 반드시 그 구조를 해체시키는 까닭이다. 더 구체적으로, 실존은 구조의 진리성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진리처럼 존속되고자 하는 구조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까닭이다.

[불교신문3594호/2020년7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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