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44> 공주 신원사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44> 공주 신원사
  • 박부영 주필
  • 승인 2020.07.01 14:11
  • 호수 35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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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法으로 새롭게 크게 일어나니 ‘新元寺’

보덕화상 열반종 사찰로 창건
산악신앙 상징 ‘중악단’ 명성
벽암스님 숭산스님 역사 기억

매년 명성황후 추모대재 봉행
지역 포교 신도교육으로 유명

계룡산은 국가가 전란에 빠졌을 때는 피난처였으며, 호남 곡창지역에서 북으로 향하는 교통 요충지여서 외적을 방비하는 군사요충지며,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기도처였다. 명산 계룡산에는 그에 걸맞는 명찰이 많다. 동학사 갑사 신원사가 그 중 으뜸이다. 세 절은 각각 동 서 남쪽 계룡산을 대표한다. 북쪽에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로 불탄 것으로 추정하는 구룡사가 있었다. 그 중에서 신원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불교와 민간 전통신앙이 결합하여 한국적 종교관을 낳은 산악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공주 신원사 전경. 계룡산 정상이 한눈에 조망되고 산과 계곡이 흘러내리는 길지에 자리한 천년고찰이다.
공주 신원사 전경. 계룡산 정상이 한눈에 조망되고 산과 계곡이 흘러내리는 길지에 자리한 천년고찰이다.

산악신앙 대표하는 계룡산

산악신앙의 결정체이자 중심지가 바로 계룡산 신원사다. 계룡산 주봉 천황봉을 배산(背山)하여 천황봉 연천봉 사이를 흐르는 계곡 옆에 자리한 신원사는 백제 시대 고찰이다. 651년(백제 의자왕 11) 열반종 개산조 보덕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보덕화상은 고구려 말 집권자인 연개소문이 당나라와 친교를 맺으며 도교를 받아들이자 이에 반발해 제자와 권속을 이끌고 백제로 망명하여 지금의 모악산 인근에 열반종을 창종하고 사찰을 건립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열반종의 시작이다. 

완산 고대산에 비래방장(飛來方丈), 경복사를 창건하고 그 제자들도 완주 대원사, 진안 금당사 등에 사찰을 창건하여 열반종 이념을 전했다. 주로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것과 비교하면 계룡산 신원사는 위치가 떨어져 있다. 왜 전북을 벗어난 계룡산에 열반종 사찰을 건립했을까? 

6월12일 찾아간 신원사는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더웠다.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 먹는 불자들 모습이 한가로웠다. 봄이면 활짝 피는 벚꽃은 여름에는 더위를 가리고 시원한 바람을 나눠주는 보살이었다. 그 옆에는 우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일회용 컵이 눈길을 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여러 명이 함께 쓰는 바가지 대신 절에서 컵을 비치한 것이다. 일일이 챙기려면 귀찮고 비용도 많이 들텐데 신도와 관광객을 배려하는 사찰 측 마음 씀씀이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쪽 건물은 국제선원이 있었던 벽수선원(碧水禪院)이다. 텅빈 선원을 하염없이 쳐다보는데 20여년 전 벽암 대종사가 거닐 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스님은 기자를 멀리했다. 기다리다 방에서 나오던 스님을 뵙고 인사드렸지만 끝내 한 말씀도 듣지 못하고 합장 인사 올리고 돌아왔었다. 짧은 만남이었는데 벽수선원을 바라볼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오른다. 

<육조단경>을 읽고 발심 출가하여 화두 정진한 선사며 선학원 이사장, 동국대 이사장, 중앙종회의장, 종정직무대행 등 중책을 맡아 어려운 종단을 지킨, 이사(理事)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존경받았다. 열반 전 “어디로 가시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무적벽수(無滴碧水)가 장강(長江)을 이루고 대해(大海)를 고갈(枯渴)시키느니라”라고 답했다 한다. ‘벽수선원’ 내력이 짐작된다. 

벽수선원은 1988년 숭산스님이 개원한 국제선원으로 유명했다. 숭산스님은 미국에 한국 간화선을 전파한, 미국 불자들이 ‘한국에서 온 달마’로 추앙하는 대선사였다. 하버드 예일 등을 졸업한 미국 지식인들은 세탁소에서 일하며 짧은 영어로 화두(話頭)를 던지는 동양에서 온 선객에게 매료돼 한국으로 앞다퉈 왔으며 이 곳 신원사 벽수선원에서 화두 정진했다. 계룡산 국사봉 아래 2002년 개원한 무상사 국제선원이 그 맥을 이어가니 신원사와 벽수선원은 바다로 연어를 떠나 보내고 다시 맞는 강처럼 서양으로 갔다가 회귀한 선(禪)의 계곡인 셈이다.
 

산악신앙이 국가차원에서 행해진 중악단.
산악신앙이 국가차원에서 행해진 중악단.

고풍스런 자태 중악단

벽수선원 옆에 단청을 하지 않는 고풍스런 건물이 중악단(中岳壇)이다. 중악단은 신원사를 상징하고 대표한다. 불교와 산악신앙이 결합한 가장 대표적 건물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 까지 이 땅을 거쳐 간 모든 왕조가 계룡산과 신원사를 신성하게 여기고 번영을 기원했던 성역이다. 신원사의 본래 이름도 신성하다는 뜻의 신정사(神定寺), 신원사(神院寺)였으니 역대 왕조가 이곳을 얼마나 귀하게 모셨는지 짐작케 한다. 

그 중에서도 조선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는 처음에 신원사가 자리한 이 지역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 공사 까지 착수했었다. 공사에 쓰였던 주춧돌이 지금도 남아있다. 수도로 점지했던 무학자초대사는 신원사를 크게 중창하고 영원사를 짓고 중악단을 세웠다. 새 왕조의 안녕과 번창을 기린 것이다. 

수도가 지금의 서울로 확정되고 중악단도 조선 중엽 후 철거됐지만 계룡산과 신원사를 신성한 곳으로 대하는 왕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임진 병자 양란을 거치고 왕실 권위가 떨어질수록 계룡산과 신원사를 향한 염원은 더 간절해졌다. 병자호란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뒤 1644년(인조22) 당시 주지 삼욱스님이 영준스님의 증명 아래 괘불을 조성했다. 노사나불 독존상인 이 괘불은 지금 까지 남았다. 국보 제299호다. 

조선이 기울어져가던 1866년(고종 3) 이름을 지금의 신원사(新元寺)로 바꾸었다. 조선이 새롭게 다시 일어나라는 의미를 담았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국운이 쇠퇴해 계룡산에서 정씨 성을 가진 위인이 나라를 일으킨다는 도참설을 잠재우려 신원사 위에 암자를 짓고 효종 때 철폐됐던 중악단을 다시 세웠다. 궁궐 양식을 그대로 본 따 만들었다. 중악단 뿐 아니라 묘향산에 상악단, 지리산에 하악단을 설치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존속하는 곳은 이 곳 신원사 중악단 뿐이다. 

한국의 불교는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산을 배경으로 절을 세웠으며 절은 산을 지키고 산을 빛내는 보석이다. 명산과 명찰이 함께 하는 이유다. 유네스코가 산을 배경으로 들어선 절을 ‘산지가람’이라는 별도의 영역을 만들어 한국 산사를 지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절집 스님들은 산을 가꾼 산주인이었다. 울창한 숲은 모두 수 백년 동안 스님들이 가꾼 결실이다. 1967년 지리산을 시작으로 국립공원을 지정할 때 스님들이 가꾼 산이 그 대상이었다. 절 숲을 빼면 당시 한국에는 멀쩡한 산이 없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고 민중들은 산과 봉우리에 불보살 이름을 붙였다. 불보살이 상주하는 불국토로 여겼다. 산 이름도 불교에서 따오고 봉우리도 불교에서 가져왔다. 이 땅의 중생들이 보금자리로 여기고 신령스럽게 모셨던 산이 불교와 결합했다. 
 

신원사를 새로 일으키며 조선 고종 시절 중창했던 대웅전.
신원사를 새로 일으키며 조선 고종 시절 중창했던 대웅전.
벚꽃이 유명한 신원사 경내.
벚꽃이 유명한 신원사 경내.

산지 가람 형성한 한국불교 

통일 신라시대부터 불국토 신앙이 자리 잡았다. 신라는 국토를 통일한 후 전국 5대 명산을 5악으로 지정하고 이를 국가적 제사처로 삼았다. 동쪽의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의 태백산 중앙의 팔공산이 그것이다. 신라의 산악 신앙은 고려로 계승돼 태조 대부터 국가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다른 4곳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계룡산 신원사 만 남았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에 까지 이어진다. 계룡산이 산악신앙을 대표하고 지금껏 명맥을 계승하는데는 몇가지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첫째 크고 높은 산세 덕분이다. 계룡산은 주변 평야를 사방에서 조명할 수 있고 많은 계곡이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하다. 신원사 위 암자 고왕암은 백제 마지막 왕자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해 숨어들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전시에는 피난처 일 정도로 깊고 높은 산세인 것이다.

또 국토의 가운데를 점하는 교통 요지다. 남의 평야에서 중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며, 경상도와 충청 호남으로 향하는 진입로에 위치해있다. 어디를 가든 계룡산을 거쳐야 한다. 신라와 백제가 국가의 명운을 놓고 겨뤘던 황산벌전투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맞섰던 전투 역시 계룡산 인근이다.

한 나라의 수도로 손색없는 넓은 들과 강이 흐르는 옥토를 거느렸다. 충남 전북에 걸친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계룡산 아래에 위치한다. 그 한복판을 금강이 흐른다. 오늘날 행정수도를 계룡산 인근으로 정한 것을 보더라도 계룡산과 그 주변은 여전히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계룡산이 갖는 중요성 때문에 보덕화상도 신원사를 창건했을 것이다. 불생불멸의 여래가 상주하는 거주처로 계룡산을 바라보지 않았을 까? 불성을 지닌 모든 중생이 성불하여 열반의 땅이며 여래의 땅에 화(化)하기를 염원하여 신원사를 세웠을 것이다. 

신원사 현 주지 중하스님은 주지로 부임한 지난 2012년부터 매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기리는 천도·추모대재를 봉행한다. 명성황후의 원과 고종황제의 명으로 폐위되었던 중악단을 복원한 공덕을 기리고 일제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황후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다. 황후가 시해된 날인 10월8일이 재일이다.

일회용 컵을 마련한 따뜻한 그 마음이 궁금했는데 황후의 공덕을 기리는 주지 스님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웃을 배려하고 작은 것에도 마음을 쏟는 주지 스님과 사찰의 자비심이 부처님 가르침이요 열반이며 모든 중생이 어우러지는 불국토 정신 아닐까? 
 

신원사 우물.
신원사 우물.

공주=박부영 주필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94호/2020년7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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