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12> 통일신라불상③ 신라 왕실과 아미타불상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12> 통일신라불상③ 신라 왕실과 아미타불상
  • 배재호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 승인 2020.07.01 14:10
  • 호수 35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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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스님 “아미타불 외며 칭명염불하면 성불한다”

스님들 정토삼부경 주해하며
‘나무아미타불’만 외운다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역설

7세기 신라왕실 아미타불 조성
구황동 석탑 출토 불상 대표적

월지 출토된 금동판 불삼존상
돈황 아미타정토변상도 닮아

7세기 후반, 백제계 유민에 의해 조성된 불비상에서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가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과정을 이미 보았다. 이러한 양상은 670년경부터 왕경 금성(金城, 경주)을 중심으로 아미타신앙(서방극락정토신앙)이 유행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에 활동한 원효(元曉, 617~686)스님은 모든 생명에 불성(佛性, 붓다가 될 수 있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칭명염불(稱名念佛,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며 생각하는 것)을 하면, 서방극락정토에 태어나 성불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구황동 삼층석탑서 발견된 금제아미타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 초에 조성됐다. 높이 12.2cm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구황동 삼층석탑서 발견된 금제아미타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 초에 조성됐다. 높이 12.2cm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나무(南無, 아미타불)를 알게 되었다고 기록될 만큼 그는 아미타신앙을 대중화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일반 계층인 광덕(廣德)부부와 엄장(嚴莊)이 정토에 왕생했다는 <삼국유사> ‘광덕엄장’의 내용은 대중화된 아미타신앙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원효 이후 법위(法威), 현일(玄一), 경흥(憬興) 등이 아미타신앙의 교학적인 기초가 되는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을 주해(註解)하면서 정토왕생의 단계를 중국 승려들보다 낮게 설정하여 왕생의 폭을 넓혀 놓은 것도 대중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아미타불상을 조성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생을 마감한 김양도(金良圖, 610~670)를 위해 조성한 흥륜사(興輪寺) 오당(吳堂, 금당 뒤편의 불전) 소조아미타불삼존상과 당나라에 인질로 갔던 김인문(金仁問, 629~694,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친동생)의 안녕을 바라며 세웠던 인용사(仁容寺)에서 그가 죽은 후 정토왕생을 위해 694년(효소왕孝昭王 3년)에 조성한 아미타불상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두 사찰에 나타난 불사(佛事)의 성격은 7세기 후반 아미타신앙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670년경, 흥륜사에서는 미륵도량(彌勒道場, 미륵상이 주존인 사찰)의 성격을 그대로 둔 채 아미타신앙이 더해졌다면, 694년경, 인용사에서는 관음도량에서 미타도량(彌陀道場, 아미타도량)으로 사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인문의 정토왕생을 위해 인용사가 현세구복적인 성격의 관음도량에서 내세적인 미타도량으로 사찰의 성격이 바뀐 상황은 7세기 말부터 신라 왕실에서 아미타신앙이 불교 신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려 준다. 

한편 신라 왕실에서 처음으로 조성했을 법한 아미타불상은 682년에 문무왕(文武王, 661~681 재위)의 원찰로 세워진 감은사(感恩寺) 금당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문무왕의 정토왕생을 위해 조성된 아미타불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681년, 문무왕이 승하하자 신문왕(神文王, 681~692 재위)은 동해의 용(龍)이 되겠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大王岩)에다 산골(散骨)하고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감은사를 창건한다. 이 사찰을 세운 신문왕이 689년(신문왕 9)에 일본 천황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금동아미타불상, 금동관세음보살상, 금동대세지보살상 등을 보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현존하는 신라 왕실 발원의 아미타불상으로는 선왕(先王)의 정토왕생을 위해 706년에 조성한 경주 구황동(九黃洞, 전 황복사지) 삼층석탑 발견 금제아미타불좌상과 왕실의 아미타신앙을 보여주는 신라 동궁(東宮) 월지(月池, 안압지) 출토 금동판 불삼존상(8세기 초)이 대표적인 예이다. 1942년, 경주 남쪽 낭산(狼山) 기슭의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아미타불좌상은 함께 발견된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의 명문을 통하여 706년(신룡 2)경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구황동 삼층석탑 발견 금동불입상, 높이 14.4cm이다.
구황동 삼층석탑 발견 금동불입상, 높이 14.4cm이다.

692년에 승하한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신목(神穆)태후와 아들 효소왕(孝昭王, 692~702 재위)이 선원가람(禪院伽藍, 왕실 사찰)에 석탑을 세웠고, 700년에 신목태후가, 702년에 효소왕이 세상을 떠나자 706년에 성덕왕(聖德王, 702~737 재위)이 신목태후와 효소왕의 정토 왕생을 위하여 불사리(佛舍利) 4개, 순금아미타상(純金阿彌陀像) 1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석탑 2층 몸돌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는 고탑(古塔)을 보수하고 그 속에 다라니를 봉안하면, 수명이 늘어나고 죽은 후에는 서방극락정토에 태어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692년에 건립된 구황동 삼층석탑(고탑)을 보수하고 이 경전을 봉안한 것도 정토왕생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 경전에 의거해 탑을 조성하고 중수하여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것은 경상북도 영주 축서사(鷲捿寺) 삼층석탑(867년 조성)과 경주 황룡사(黃龍寺) 구층목탑(872년 중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한다. 

실제 석탑에서는 금동불입상과 금제불좌상이 발견되었는데, 명문의 순금아미타상은 일반적으로 금제불좌상에 비정된다. 금제아미타불좌상은 불신(佛身), 광배, 대좌를 따로 만들어 조합하였는데, 광배는 불신의 등 뒤가 아닌 대좌 윗면에 고정하였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연화대좌 위에서 가부좌하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보인 설법인을 결하였으며, 왼손은 손등을 위로 한 채 무릎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몸에 비해 큰 편인 얼굴에는 원만하고 인자한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의 표정이 엿보인다. 법의 주름은 신체의 굴곡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불상은 적절한 신체 비례와 섬세하고 입체적인 법의 주름, 수준 높은 표현에서 왕실이 발원하고 당시 최고의 장인인 계생(季生)과 알온(閼溫)이 만든 것임을 알려 준다.

7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오른손은 들어 올려 설법인을 결하였으며, 왼손으로는 법의 자락을 움켜잡고 있다. 불상은 보주형 두광과 연화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머리와 손이 몸에 비해 약간 큰 편이다. 법의 자락은 가슴부터 반복해서 U자를 그리며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월지 출토 금동판 불삼존상은 통일신라시대 7세기 말 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7.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월지 출토 금동판 불삼존상은 통일신라시대 7세기 말 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7.0cm.

한편 신라 왕궁의 동궁 연못인 월지에서는 신문왕이 689년에 일본에 보낸 금동아미타불삼존상을 연상하게 하는 금동판 불삼존상이 출토되었다. 금동판 불삼존상은 왕실 사람들의 아미타신앙 의례가 이루어지던 내불전(內佛殿, 궁중 속 불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판 불삼존상이 어떤 불상과 보살상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삼존상의 도상 구성과 불좌상의 수인이 당나라의 642년경에 조성된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220굴의 아미타정토변상도와 일본 7세기 말에 그려진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금당의 아미타정토변상도의 불상과 닮아서 도상 해석에 참고가 된다. 

금동판 불삼존상의 가장자리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어디엔가 부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불감의 잔편으로 추정되는 “佛龕第一(불감제일)”이라고 새겨진 칠판(漆板, 옷칠이 된 나무판)이 함께 출토되기도 하였다. 2개의 금동판 불삼존상과 서로 다른 크기의 4개의 금동판보살좌상에는 어딘가에 끼울 수 있게 밑부분에 촉이 나 있다. 

금동판 불삼존상과 보살좌상들이 어떤 방식으로 봉안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막고굴 220굴의 아미타정토변상도를 불감 형식으로 표현하였거나 서방극락정토를 석굴 속 벽면과 바닥에 입체적으로 조성한 용문(龍門)석굴 고평군왕동(高平君王洞)과 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평군왕동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조카 무중규(武重規, 고평군왕)가 700년경에 고모인 측천무후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금동판 불삼존상의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둥글고 통통한 얼굴, 넓은 어깨, 양감이 느껴지는 가슴과 두 다리,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된 크고 작은 법의 주름, 미세한 움직임까지 나타낸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지고 있다. 협시보살상들은 팔등신에 가까운 늘씬한 신체 비례, 관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자세, 유려하게 처리된 천의 자락을 갖추고 있다. 

8세기 이후, 신라 왕실에서는 정토왕생을 위한 아미타불상 조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계화(桂花)왕후가 801년에 남편인 소성왕(昭聖王)의 정토왕생을 위해 만든 무장사(鍪藏寺) 아미타불상에 대한 기록만 확인되고 있다. 

높이 21.5cm의 월지 출토 금동판 불삼존상.
높이 21.5cm의 월지 출토 금동판 불삼존상.

[불교신문3594호/2020년7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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