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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살 학성스님, 해인사 대적광전 앞에서...

스님들의 출가담은 저마다 사연이 있다. 신참 스님 보다는 구참 스님들의 출가담이 더 멋들어지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세태를 담고 있어서일 것이고, 또 오랜 세월에 조금씩 덧붙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구참 스님들 중에는 발심 출가가 유독 많다. 철이 들기도 전, 어린 나이에 출가할 마음을 낸 스님들의 사연은 더 재미있다. 영천 만불사 회주 학성스님도 15세 때 해인사에서 한달을 버티고서야 비로소 사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15살 때 해인사로 입산한 학성스님(오른쪽)은 순수했던 해인사 강원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어릴 적 기억은 평생의 스승 같은 것이다. 1976년 5월, 강원 도반 보원스님(선운사)과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주름등과 팔각등, 만자 깃발과 청홍색 번이 걸려있다.
15살 때 해인사로 입산한 학성스님(오른쪽)은 순수했던 해인사 강원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어릴 적 기억은 평생의 스승 같은 것이다. 1976년 5월, 강원 도반 보원스님(선운사)과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주름등과 팔각등, 만자 깃발과 청홍색 번이 걸려있다.

 

#1
어머니를 따라 고향인 강원도 양구에 있는 절에 갔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는 초등학교 4학년 때니까 10살 무렵이다. 보덕암이라는 절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절에 온 아이가 기특했던 주지 도진스님은 선물로 책을 건넸다. 받고보니 스님들의 전기였다. 책 속의 스님들의 일대기는 참으로 멋졌다. 출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넉넉한 형편이었지만 엄마는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알고는 용돈을 주지 않았다. 사건은 15살 때 벌어졌다. 춘천의 큰이모댁에 갔다가 출가를 결행했다. 이른 새벽 춘천역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알고 있는 절이라곤 책에서 본 해인사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절이라고 했는데 어찌 가야하나. 방황하다가 외갓집이 있는 원주행 기차를 탔다.

원주 치악산의 유명한 절 구룡사로 들어갔다. 구룡사는 당시 대처승의 절이었다. 구룡사를 찾은 객승이 일러준대로 서울 용산역과 서부터미널을 거쳐 해인사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해인사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15살 소년을 행자로 받았다가 이내 속퇴하면 절 분위기만 이상해질터였다. 처사들의 방에서 기숙하며 한달을 버텼다. 고집에는 장사가 없다.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봉주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됐다.

당시 해인사엔 행자가 무려 30명이나 있었다. 행자 반장은 뒷방 최고의 권력이다. 학성스님이 행자로 있을 때 행자 반장은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지낸 자승스님이었다.

#2
이듬해 1972년 사미계를 받았다. 큰방에서 100여명에 달하는 대중에게 인사하는 방부식을 거쳐야 했다. 큰방 끝에서 반대편 끝으로 가로질러 기어가야 하는 통과의례다. 가운데는 옷을 묶은 기다란 줄을 놓아, 행여라도 몸이 줄에 닿으면 입방할 수 없는 무서운 의례다.

사실 모든 대중은 사미가 줄에 닿아도 상관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새로 입방하는 사미만 모를 뿐이었다. 눈을 가린 입방자가 줄에 닿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방을 가는 모습에 박수를 쳐가며 웃기 위한 것임을 감히 상상을 할 수나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산중은 참으로 순수했다.

해인사에서 출가했으니 당시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던 해인사 강원에 입학했다. 나이가 어렸던 학성 사미는 개구쟁이 학인이었다. 자리가 정해진 장삼을 바꾸어 걸어놓기는 가장 흔한 장난이었다. 종을 치는 채가 사라져 종을 치지 못하는 종두. 당황하는 학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산내암자를 돌며 먹을거리를 서리하기도 했다.

국일암, 삼선암, 약수암, 금선암은 아예 학인들의 서리를 애써 막지 않았다. 학인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일부러 내놓기까지 했다. 단지 채로 고추장을 가져다가 먹는 짓궂은 학인들까지도 용서했다. 학인들이 그렇게라도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아마도 어른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3
16살의 사미에게 절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겨울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가슴을 때렸고, 차가운 달빛에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는 해인사 아래 홍류동 계곡을 뛰어다녔다. 가야산 정상까지 한걸음에 내달리기도 했다. 처음 해인사에 왔을 때 그렇게 커보이던 해인사가 좁게 느껴졌다. 원해서 출가했지만 절에서 사는 답답함이 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탓이다.

해인사 대중생활은 규칙이 엄격했다. 강원의 청규도 있지만, 학인들끼리 암묵적으로 지키는 룰도 있다. 토가 없는 경전을 공부하려면 반드시 예습을 해야만 한다. 토가 없으니 미리 공부하지 않으면 끊어 읽을 수 없어 시간이 한없이 길어진다. 예습하지 않은 날, 혹시라도 산통에서 자신의 이름이 잡혀 나온다면 눈총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았다.

옛 사진첩을 뒤적이던 학성스님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19765월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대적광전 앞마당에 괘불이 걸려있고 지금은 볼 수 없는 팔각등과 주름등, 만자 깃발, 청홍색의 번이 배경으로 있는 사진이었다.

학성스님은 장삼에 5조 가사를 수했다. 제법 어른티가 나지만 사진 속 학성스님의 나이는 겨우 19살이었다. 이 즈음 학성스님은 10권짜리 <만해전집>불교 보다 더 대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행하리라는 문구를 적어놓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불교를 능가하는 무엇도 만나지 못했다.

영천=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593호/2020년6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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