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의식주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승가도 존재하고
누구나 마음 놓고
수행정진 할 수가 있다
그래야만 불법이 오래토록
이 세상에 존재할 것임은
자명한 이치이다
부디 스님들의
걸망 풀 곳을 허하소서!

진광스님
진광스님

찬불가 중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라는 노래가 있다. 이는 고려말 명승인 나옹스님의 선시로 유명하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한 스님이 걸망을 둘러맨 채, 어디론가 허허로이 떠나가는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은 법이다. 

누군가는 “떠나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건 스님밖에 없다”라는 말을 한다. 하기야 안개 자욱한 새벽녘에 걸망 하나 둘러맨 채, 소나무 숲길을 따라 어디론가 떠나가는 스님의 뒷모습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모습들이 현실 속에서는 실로 참혹하고 슬픈 경우가 있다. 이른바 동병상련의 아픔이라고 할까? 저 묵직한 걸망속의 잡다한 물건들을 대체 어느 곳에 갖다 놓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출가 후 늘어나는 책과 물건들을 보면서 때론 절이나 도서관 등에 수차례 기증한 바가 있었다. 그래도 나중에는 또다시 구입하게 되니 악순환의 연속이다. 다행히 사하촌의 어느 보살님이 마음을 내 주어 그 집의 다락방에 짐을 보관하게 됐다. 그 세월이 25년 넘게 됐으니 필자는 그나마 복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님네들은 인연 있는 절과 스님들에게 맡기거나 여러 지인들의 집에 나누어 보관하곤 한다. 심지어 속가에 맡기는 것도 작금의 현실이다. 

그래서 걸망 매고 공부를 하러 다니고 싶어도 짐을 맡길 곳이 없어서 못한다는 볼멘소리가 다 나오는 지경이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이 문제는 변함없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아니 선배 스님들의 얘기로는 당시도 똑같이 그랬다는 걸 보면 이는 종단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젠가 필자는 ‘수미산정’ 코너에서 요사와 짐보관소를 겸한 사회적기업 형태의 승려복지시설을 설립하고 운영하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 그러나 워낙 박복한데다 마음만 가지고는 쉽지 않은지라 종단과 교구본사의 결단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것의 실현이 난망(難望)하기만 하다.

이젠 출가자도 급감하고 탈종교 현상의 심화로 인해 불교의 존망을 걱정해야할 엄중한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종단은 승려복지의 차원에서 특단의 방침을 정하고 힘써 실천해 나가야만 한다. 출가한 스님이 아직도 주거(住居)와 의식(衣食)을 걱정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이런 종단에 출가를 하려고 하겠으며, 어찌 한국불교의 중흥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각 교구본사가 스님들의 해제 후 휴식과 간병을 위한 요사채와 짐보관소를 구비했으면 한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면 짐이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짐보관 시설이라도 마련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굳이 민가를 사서 토굴을 마련하거나, 애써 아파트 같은 곳에 들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는 승가의 ‘승자독식사회’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타개하고, 왜 승가가 무소유와 화합의 공동체인지 증명하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맹자가 이르기를 “무릇 항산(恒産)이 있는 곳에 항심(恒心)이 있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의식주(衣食住)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승가도 존재하고, 누구나 마음 놓고 수행정진 할 수가 있다. 그래야만 불법이 오래토록 이 세상에 존재할 것임은 자명한 이치이다. 부디 스님들의 걸망 풀 곳을 허(許)하소서!

[불교신문3593호/2020년6월27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