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당시 통도사에 육군병원 정양원이 설치돼 경내 전각에서 부상병을 치료하고 스님이 전사자 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왔다. 본지는 몇 차례에 걸쳐 이 사실을 관련자 증언을 청취해 보도해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번에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나온 것이다. 

본지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국군이 병원 건물로 사용한 통도사 대광명전 벽면에 당시 부상병들이 새긴 낙서가 다수 발견됐다. 대광명전에는 퇴원, 전우, 정전 등 전쟁 관련 단어와 간단한 문장, 군인 모자, 탱크, 트럭 등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못, 연필, 칼 등으로 새긴 글과 그림은 대부분 전쟁과 관련된 내용이며 단기 ‘4284년’,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라는 연도가 함께 적혀 있었다.

낙서 외에 통도사 안에 있던 보광중학교를 다닌 졸업생들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해 국군병원 존재를 뒷받침했다. 통도사 국군병원은 사찰에서도 기록으로 남겨 본지가 보도한 바 있다. 지난해 9월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 복장 유물 안에 1952년 구하스님이 작성한 연기문에 ‘통도사에 병원이 설치되어 상이병(傷痍兵) 3000여 명이 머물렀으며, 1952년 4월12일 철수했다’는 내용이 나왔다. 

이처럼 많은 기록과 자료 증언이 통도사에 정부가 운영하는 국군병원이 설치됐음을 보여준다. 전쟁 중에 사찰이 정부가 운영하는 야전병동으로 이용됐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우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역사는 사실을 밝히고 진실을 드러내어 현재와 미래 교훈을 얻는데 의미가 있다.

역사 기록의 첫 장인 사실이 밝혀진만큼 운영 주최인 국군병원과 국방부 정부가 나서 이를 공식화 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정부는 이에 관해 조사 시도는 커녕 확인조차 않고 있다. 현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6·25 당시 현황에 대해 아주 중요한 자료가 나왔는데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고고학에서는 파편 한 점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인력 비용을 들이는데,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보여주는 그 많은 기록과 증언 자료를 보고서도 외면하는 정부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올해는 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7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전쟁의 완전한 얼굴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후유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해결하려는 노력 또한 지난하게 이어지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전쟁에서 부상병들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치료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료는 당시 전쟁에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물증이다. 이러한 기록과 연구를 통해 정부의 역할, 군과 민과의 관계 등을 설정하고 교훈을 얻는다. 

통도사 육군병원은 군과 정부가 통도사에 많은 신세를 지고 피해를 입혔으며 통도사는 전쟁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쟁 중에는 불가피했다 해도 지금이라도 보상하고 기념해야 한다. 그것이 정부 역할이다. 통도사 육군병원을 거쳐 간 부상병, 전사자, 책임자, 운영 주체 등도 정부가 나서 밝혀야 한다. 정부의 빠른 조치를 기다린다.

[불교신문3593호/2020년6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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