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 왕성한 날’ 더위와 재액 물리치는 민속 성행

‘단오선물은 부채, 동지선물은 책력’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계절이다. 단오(端午)는 설ㆍ한식ㆍ추석과 함께 4대명절로 꼽혀, 이날 천지신명과 조상에 제를 지낸 기록이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이 무렵은 여름곡식 보리를 거두어 보릿고개를 넘고 가을추수를 위한 모심기가 끝나는 모처럼의 농한기라, 마을마다 풍년을 빌며 축제를 펼쳤다. 

특히 양기가 왕성한 단옷날이면 더위와 각종 재액을 물리치는 세시풍속이 성행했다. 대궐에서부터 민가에 이르기까지 단오부채 선물이 오가는가하면, 화재를 막기 위해 소금을 처방하고 물을 다스리는 용신(龍神)를 섬겼다. 이와 함께 삿된 기운을 쫓는 비방과 음식이 다채롭고, 씨름과 그네타기 등 이열치열로 심신을 단련하는 민속이 풍성했다. 사회가 변해도 단오가 지닌 상징성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사찰에서 전승되는 의례를 통해 살펴본다. 
 

양산 통도사 구룡지에서 지낸 2016년의 단오용왕재 모습.
양산 통도사 구룡지에서 지낸 2016년의 단오용왕재 모습.

양기의 활용과 제압

단오에는 양기(陽氣)를 활용하는 민속과 억누르는 민속이 공존하여 흥미롭다. 음력 5월 5일은 양수(陽數) 5가 중첩된 날이자 오행이 충만한 의미를 지녀, 연중 양기가 가장 강한 날이다. 우리말로도 ‘으뜸가는 날’이라는 뜻에서 단오를 ‘수릿날’이라 불렀다. 몸의 제일 윗부분인 머리 위를 ‘정수리’라 하듯이 ‘수리’란 ‘높다, 귀하다, 신령스럽다’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충만한 양기를 활용하는 민속은 강한 향으로 삿된 음기를 물리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단옷날 쑥을 머리에 꽂거나 창포뿌리로 단오잠(端午簪)이라는 비녀를 만들어 꽂는 풍습,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 풍습, 쑥과 익모초로 떡을 만들어먹는 풍습들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이날 오시(午時)에 뜯은 풀을 최고로 여겼는데, 단옷날 중에서도 양의 기운이 가장 강한 시간에 수확했기 때문이다. 또한 ‘5월 5일 천중절(天中節)에 하늘의 녹과 땅의 복을 얻어 404가지 질병이 일시에 없어져라’라고 쓴 단오부적을 만들어 집집마다 붙였다. 

이와 나란히 왕성한 양기를 경계하는 민속이 전승되어왔다. 양기가 심하면 불기운을 머금어 화재와 가뭄을 가져오니, 단옷날 부족한 음기를 보충해 극에 달한 양기를 억눌러야 화재를 막고 풍농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마을과 사찰에서는 물을 다스리는 용이 능히 불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아 용왕제를 지내고, 바다를 상징하는 소금을 묻거나 들보에 올려놓음으로써 불을 누를 수 있도록 처방했다. 마을 주변에 화기가 강한 산(火山)이 있으면 맞은편 산에 소금단지를 묻어서 이를 제압하는 풍수지리의 비책을 쓰기도 한다. 

이러한 세시풍속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강릉단오제와 법성포단오제를 비롯해 전주풍남제ㆍ남원춘향제 등 전국곳곳에서 단오축제를 펼쳐 명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보리수확으로 한해농사의 절반을 마감하고 가을수확을 앞둔 양기 왕성한 날, 우주자연의 기운을 품은 신들에게 감사하며 공동체의 보호와 풍요를 기원하는 대축제이다. 
 

합천 해인사 스님들이 남산제일봉에 올라 소금단지를 묻는 의식. Ⓒ불광미디어
합천 해인사 스님들이 남산제일봉에 올라 소금단지를 묻는 의식. Ⓒ불광미디어

합천 해인사 ‘소금 묻기’ 

해인사에서는 단옷날이면 사찰 경내와 남산에 소금을 묻는 오랜 전통이 있다. 〈해인사지〉에 따르면, 조선 중후기에 180여 년간 일곱 차례의 화재가 나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자 이에 대한 방책으로 1871년부터 소금 묻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화마(火魔)로부터 팔만대장경과 가람을 지키고자 본ㆍ말사 사부대중이 다함께 참여하는 소중한 의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단옷날 이른 아침이면 주지스님을 비롯해 강원ㆍ선원ㆍ율원의 대중스님과 신도들이 모여 불공을 올린 뒤 소금 묻기가 이어진다. 해인사의 경내 곳곳에는 홈이 파인 염주석(鹽柱石)이 있어 그곳에 소금을 넣고 물을 부어 바닷물을 만드는 것이다.

대적광전 앞부터 시작하여 우화당ㆍ봉황문ㆍ극락전ㆍ율원의 염주석에 소금을 묻고 나면 스님들은 남산제일봉에 오르고, 신도들은 사찰 외곽인 용탑ㆍ원당암 등에 소금을 묻는다. 경내에서 외곽으로, 외곽에서 산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불기운을 누르는 의식을 이어간다. 

남산제일봉에 소금을 묻는 것은 그 형상이 불꽃처럼 날카로워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라는 데 있다. 이 산이 해인사가 자리한 가야산과 마주하고 있기에 소금을 묻어 화기를 제압하는 풍수비보(風水裨補)를 하는 것이다. 본사의 주지스님과 일행이 산을 오를 무렵, 말사에서도 시간에 맞추어 저마다 산을 오른다. 이처럼 수많은 사부대중이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산길을 오르는 것 또한 불기운을 밟고 잠재우는 과정이다. 

남산제일봉에서 만난 본ㆍ말사 대중은 공양물과 다섯 개의 소금단지로 상을 차려 불공을 올린 다음,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五方)에 소금단지를 묻는다. 미리 파놓은 구덩이마다 소금단지를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뚜껑과 흙을 차례로 덮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지에 싼 소금을 바위 사이마다 끼워 넣고 하산한 스님들은, 이날 오후 다시모여 단오체육대회를 열고 심신을 단련한다. 수행 깊은 출가자들이 하나의 원(願)으로 사방에서 산을 밟아 오르내리고, 다시 그 기운을 모아 함성을 울리니 어찌 화마를 누르지 못하겠는가. 

양산 통도사 용왕재

통도사에서는 단옷날 용왕재(龍王齋)를 지내고, 대웅전에서부터 공양간에 이르기까지 전각의 들보머리에 얹혀있던 소금단지를 새 소금으로 교체하는 의식을 치른다. 통도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대광명전 내부에는, 좌우 천정 밑 도리에 화마(火魔)를 물리치는 항화마진언(抗火魔眞言)이 묵서로 적혀 있다. 

“우리 집에 손님 한 분이 계시니 틀림없이 바다의 사람이라. 입안에 하늘까지 채우는 물을 머금어 능히 불의 정령을 제압하네(吾家有一客 定是海中人 口呑天漲水 能殺火精神).” 임진왜란 때 통도사의 모든 건물이 불탔으나 유일하게 대광명전은 화재를 비껴갔다고 한다. 그 이유가 화마를 막는 게송 때문이라 여겨 이른 시기부터 모든 전각과 요사에 소금단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용왕재를 지낼 때면 아침 일찍 수백 명의 사부대중이 적멸보궁 옆 구룡지(九龍池)에 모여, 각종 공양물과 60여 개의 크고 작은 소금단지를 차려놓고 ‘용왕청’에 따라 용왕기도를 올린다. 구룡지는 자장율사와 아홉 마리 용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지금도 한 마리가 남아 통도사를 지켜준다고 한다. 따라서 창건주와 관련된 용이 머무는 연못에서, 물을 다스리는 용왕에게 공양을 올리며 화재를 막고 한 해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기도를 마치면 주지스님이 신도들에게 일일이 소금봉투를 나눠주고, 한편에서는 각 전각마다 소금단지를 얹는 의식이 이어진다. 학인스님들이 상로전ㆍ중로전ㆍ하로전 영역으로 나누어 각 전각의 들보머리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소금단지를 올린다.

소금단지는 전날에 묵은 소금단지를 모두 내려서 새 소금을 넣은 다음 항화마진언을 새긴 한지로 밀봉해둔 것이다. 화마를 잠재우는 용왕재를 올리고 전각의 들보마다 바다를 머금은 소금단지를 얹었으니, 한 해의 평안이 빈틈없이 지켜질 법하다. 
 

서울 조계사 스님들이 신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 ⓒ불교신문
서울 조계사 스님들이 신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 ⓒ불교신문

서울 조계사에서는 세족식 

조계사에서는 ‘화기애애(火氣愛愛)’라는 단오법회를 연다. 단오의 화기(火氣)를 누르고 화기(和氣)를 더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날 모든 가정의 행복을 빌고 화재를 막는 의식을 행하면서, 소금ㆍ창포ㆍ부채 등 단옷날의 여러 요소와 함께 전통 세시풍속을 이어가고 있다. 

먼저 대웅전 불단에 네 개의 소금단지를 올려놓고 법회를 올린 다음, 이를 마당으로 가져와 한지에 ‘물 수(水)’ 자를 쓰고 봉인하여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대웅전 앞마당 곳곳에 묻는다. 

또한 주지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이 여든 넘은 신도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창포 삶은 물에 발을 씻어드리는 세족식(洗足式)이 이어진다. 스님들은, 불성을 지닌 모든 중생이 부처님임을 새기며 ‘설법을 마친 부처님의 발을 씻겨 드렸던 제자의 마음’으로 행하는 의식이라 한다. 삼보의 한 존재인 스님께 자신의 발을 맡긴 신도들은, 묵은 업장이 씻겨나가는 크나큰 은덕으로 새기며 더욱 발심하는 감동의 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스님들은 동참대중에게 부채와 소금을 나눠주며, 더위와 우환을 물리치고 마음속 화마까지 누그러지길 기원했다. “삼재팔난과 우환을 모두 이 부채바람에 날려버리고, 건강하고 시원한 여름을 보내세요.” “이 소금으로 음식을 만들어 드시면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마음의 화기를 누르기 바랍니다.” 단옷날의 ‘소금 처방’에서 우리가 새겨야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단오와 소금의 관계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화기와 이를 잠재우는 청정수행으로 새겨야 한다. 물리적인 화재와 재앙만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일어나 마음을 들끓게 하는 삼독의 화마를 거름으로 삼아,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를 찾아가자는 의미가 단옷날 사찰에서 나누는 소금에 담겨있다. 

이처럼 민간에 사라져가는 단오문화가 사찰에서 전승되고 있어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음력을 근간으로 한 전통문화의 계승주체로서 불교의 특성이 부각되는 지점이다. 사부대중이 함께 삼보를 지키는 종교공동체의 신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더욱 튼실한 맥락을 이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단옷날의 풍습 또한 단오명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화기를 누르고 부처님과 함께 화목한 기운을 가득 채우는 여법한 모습으로 전승되고 있다.

[불교신문3593호/2020년6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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