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시은 무겁게 여기고 법회·교육 충실히 준비”

1971년 고3수업 끝나자마자
곧바로 봉녕사서 출가발심
동국대 졸업 후 전통교육 이수
내외전 두루 익히고 선방 정진

주지 소임 “그저 열심히 할 뿐”
승가교육 최우선으로 삼아
훌륭한 수행자 배출 노력

수원 봉녕사는 도심에 자리한 승가교육도량이다. 묘엄스님(1931~2011)이 1974년 초반 강원을 개설, 본격적으로 후학들을 지도한 이래 봉녕사는 지금까지 승가교육도량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봉녕사 주지 진상스님 출가한 해인 1971년 봉녕사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퇴락한 고찰이었다. 요사이는 호롱불 켜고 공부하던 사찰이었다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달라졌다. 경내에는 여러 전각이 세워졌고, 봉녕사 주변으로는 신도시가 조성됐다. 진상스님은 1971년 출가해 50년 가까이 봉녕사의 모든 변화를 지켜봤다. 지난해 주지 소임을 맡아 신도교육과 전법, 승가교육을 지원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진상스님을 6월11일 만났다. 

2019년 8월 봉녕사 주지 소임을 맡은 진상스님은 승가교육과 신도교육, 법회 등을 지원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2019년 8월 봉녕사 주지 소임을 맡은 진상스님은 승가교육과 신도교육, 법회 등을 지원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스님은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을 마치자마자 봉녕사로 와 출가했다. 승가대학도 개원하기 전, 은사인 묘엄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과 치문, 사집을 배우다가 동국대에 진학했다. 승가학과 3기인 스님은 쌍계총림 쌍계사 주지 영담스님, 운문사 일진스님, 입적한 흥륜스님 등과 같이 공부했다. 그 때만해도 스님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동국대를 졸업한 묘엄스님의 권유로 대학에 간 스님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스님은 “은사 스님은 아마도 저를 강사로 키우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제게 직접 말씀하진 않았지만, 어른 스님들로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해서 강단에 서기를 바랐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스님이 동국대에서 공부할 무렵인 1974년 묘엄스님은 봉녕사에 강원을 열어 봉녕사 승가교육의 장을 열었다. 진상스님 역시 동국대를 졸업하고 봉녕사 승가대학에 입학해 은사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강사가 됐으면 하는 어른 스님의 바람과 달리 스님은 구족계를 수지한 후 선원으로 갔다. 교학이 아닌 선방에서 정진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결제 때는 선원에서 정진하고 해제 때는 봉녕사에서 소임을 살았다.

“은사 스님은 ‘계율과 경전은 마음을 닦는 법이다. 계율은 구속하는 것에 아니라 가장 신사다운 삶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런 가르침에 의해 바르게 참선 수행해서 바른 우주관과 인생관을 확립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중생심은 달팽이 뿔과 같아서 조그만 역경계에도 쏙 들어가는데, 신심과 원력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물러서지 않는 굳건한 서원을 세워서 수행하라”고 당부했는데 그 가르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가르침을 따라 스님은 참선하고 전법하며 수행자 본분에 최선을 다했다. 

봉녕사 중창불사가 한창일 때 총무 소임을 살다가 20년 만에 주지를 맡은 스님은 “어떻게 하면 온 대중이 화합해 공부하고 코로나19 사태에도 아무 장애 없이 수행정진에만 전념할 수 있을까”를 화두 삼아 노력하고 있다. 최근 출가자가 줄어들면서 학인 스님들도 많지 않다. 적은 인원이 기본적인 소임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후배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잘 해주고 있어 대견하다고 스님은 말했다.

애쓰는 후배들을 위해 스님은 승가의 정신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육환경개선이나 외래교수초빙 등 교육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요새 출가자들에게 옛날 살던 것처럼 살아야 된다고 강요할 수 없다”는 스님은 “공부하는 데 어려움 없게 지원하지만 신도들 시은이 정말 무섭다는 것만큼은 철저히 교육해 승가의 옛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봉녕사가 신도들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10여 년 사이 용인의 수지와 수원 광교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봉녕사도 달라졌다. 우선 신도들 연령이 낮아졌다. 50대 60대가 주축을 이루지만, 40대 신도들도 많다. 젊은 세대에 맞춰 법회와 신도교육도 달라졌다. 봉녕사는 교육도량답게 신도교육 역시 단계별로 진행한다. 심우불교대학 내 기본반을 두고 불교대학 졸업 후에는 경전반으로 진학해 부처님 법을 체계적으로 정확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하고 봉사로도 연계될 수 있게 지도하고 있다.

법회도 다양하다. 일요법회, 어린이 천진불 법회, 거사림법회, 천진불 어린이 자모법회, 템플스테이, 관음재일·지장재일·초하루법회 외에도 때에 따라 특별법회를 연다. 특히 일요법회는 오후2시에 시작된다. 대개 사찰에서 오전10시 법회를 여는 것과 비교되는데, 천진불어린이법회 시간대와 일부러 맞춘 것이다.

“신도시다보니 초등생을 둔 부모들이 많아서 어린이법회에 아이를 맡기고 자모들은 법회를 들을 수 있게 시간을 변경했다”고 스님은 설명했다. 스님은 “법회를 다양하게 열어 누구라도 봉녕사에 오면 여러 인연으로 부처님 법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찰음식교육관 금비라는 웰빙과 슬로우 푸드 대명사인 사찰음식을 매개로 불교를 전하는 공간이다. 이는 은사 스님의 유지를 잇는 일이기도 하다. 묘엄스님은 생전에 생활 전반을 차지하는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청정한 사찰음식을 포교의 방편으로 활용해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아울러 부처님 법을 전하라는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체계적인 교육과 법회 덕분에 봉녕사는 신도회 조직이 탄탄히 구성돼 있다. 진상스님은 신도들을 ‘외호신장’이라고 부른다. 봉사하는 신도들이 없었다면 식차마나니계 수계산림, 8년 째 이어오는 계율과 명상 특강, 사찰음식대향연 등 큰 행사들을 제대로 치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공부하고 수행하고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더 신심을 내는 신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진상스님은 봉녕사를 신도들 마음의 안식처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 교육이나 법회가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봉녕사는 수원에서 첫 번째 확진자 나온 이후 2개월 정도 산문을 폐쇄했다. 교육기관 대중 스님들 건강을 우려해서다. 운영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스님은 ‘학도비구(學道比丘)에 제천(諸天)이 여의식(與衣食)이라, 도를 배우는 스님에게는 하늘에서 의식을 준다’는 옛말을 떠올리며 희망을 내비쳤다.

이어 “조선시대 불교가 배척당했음에도 법등을 이은 것은 수행하는 힘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라며 “출가수행정신에 입각해서 보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출가한 것은 아니라 수행정진 하려고 출가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어하는 국민과 불자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져 지루해하고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는 TV나 게임을 하고, 누군가는 400번을 저어야 완성되는 커피를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스님은 TV를 보거나 커피를 400번 젓는 행위자체가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공부를 할 수 있다”며 “커피를 젓고 있는 그 순간에 나를 살핀다면 그게 바로 명상이고 참선”이라고 했다. 나를 살피는 관조가 처음엔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일상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스님은 확신했다.

바이러스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지만 깨달은 바도 있다. 진상스님은 “우리가 늘 달리기만 하다가 잠깐 멈춰서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도 보였을 것”이라며 “경제가 어려워 막막하지만 한편으로는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삶이 얼마나 짧은지 우리가 얼마나 물질에 매달려 살았는지를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또 “현재 있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 모두에게 받은 은혜로 살아가니 나도 조금이나마 되돌려주겠다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감사함을 갖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힘차게 일어서자”고 말했다.
 

수원 봉녕사 주지 진상스님
수원 봉녕사 주지 진상스님

◼ 진상스님은…
1971년 12월 고등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봉녕사로 와 묘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 승가학과에 진학해 1978년 졸업한 후 다시 봉녕사승가대학에서 공부했다. 1980년 3월 송광사에서 일타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수선안거 한 이래 10안거를 성만했다. 또 1988년부터 3년간 봉녕사 교무 소임을 맡았고,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총무를 지냈다. 2009년 명덕법계를 품서 받은 스님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동인사 주지를 지내다가 지난 2019년 8월30일 봉녕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수원=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3593호/2020년6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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