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지옥 장면 보니, 죄업 짓지 말아야겠구나…”

조선왕실 원찰이었던 흥국사
선조 부친 덕흥대원군 능침사

불화 그리는 ‘화승양성소’
서울경기지역 불화제작 주도

망자 죄업 심판하는 10명의 왕
10폭 화면마다 특징 담아 그려

명부 제존 역할과 지옥 장면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수작’

불교의 사후세계, 명부(冥府)에서 시왕(十王)의 역할은 강력하다. 망자의 생전 죄업을 심판하고 육도(六道) 중 다음 생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시왕은 때론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에 함께 그려지기도 하지만, ‘시왕도(十王圖)’라는 별도의 그림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묘사된다.

더욱이 시왕도에는 지옥 장면이 함께 그려져 있어, 불교에서 얘기하는 지옥과 그 고통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이번에는 조선 후기 시왕도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시왕도를 통해 시왕과 그 권속의 성격, 그리고 각종 지옥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792년 조성된 흥국사 시왕전의 목조시왕상과 시왕도 일부.
1792년 조성된 흥국사 시왕전의 목조시왕상과 시왕도 일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 자락에는 일명 ‘덕절’이라고도 불리는 전통사찰이 있다. 바로 흥국사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 말사 중 하나로, 행정 구역상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속하지만,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버스로 십여 분 남짓 밖에 안 걸리는 근기(近畿) 사찰이다. 이곳은 조선 왕실과 특히 인연이 깊다.

선조 임금의 부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능묘를 지키는 능침(陵寢)사찰이기 때문이다. ‘덕절’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조대에는 5규정소(五糾正所) 중 하나도 지정되었고 그 후로도 왕실의 지원을 받아 법당과 요사를 수차례 중수했다. 또한, 고종대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사찰 현판과 주련을 친히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남양주 흥국사는 한 가지 특이점이 더 있다. 바로 이곳이 불화를 그리는 스님들, 즉 화승(畵僧)들의 양성소였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불화는 발원자 계층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찰의 스님들이 전담해 그렸는데, 서울과 경기인 소위 ‘중앙’의 불화들은 주로 이곳 출신 스님들이 맡아 제작했다. ‘덕절의 중은 불을 때면서도 불 막대기로 시왕초(十王草)를 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흥국사 불화들이 전체적으로 수작인 것도 흥국사의 이러한 특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흥국사는 대웅전이 주불전이며, 그 우측(대웅전을 바라보고 섰을 때 좌측)에는 영산전이 위치하고 좌측에는 시왕전이 있다. 흥국사 시왕전(十王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건물로, 명부전(冥府殿)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즉, 망자들의 명복을 빌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예배와 기도를 하는 곳이다. 시왕도 그림은 이곳에 봉안되어 있다. 

정면 중앙의 불단 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협시 도명존자와 우협시 무독귀왕이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지장보살도가 후불화(後佛畵)로 걸려 있다. 전각의 명칭이 ‘시왕전’임에도 중앙에 지장보살을 모신 것은, 지장보살이 명부의 주존이기 때문이다.

시왕은 지장삼존의 좌우로 각 5위씩 위치한다. 지장보살의 경우처럼, 앞에는 시왕과 그 권속의 조각상이 위치하고 그 뒤로 총 10폭으로 구성된 시왕도가 걸려 있다. 흥국사 시왕전 내 조각과 그림은 모두 같은 해인 1792년(정조 16년)에 일괄 조성된 것이다.

시왕은 망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10명의 왕’으로, 지장보살과 더불어 명부 신앙의 핵심 존재이다. 시왕은 인도 브라만교의 명부 신앙이 불교로 수용된 이후 중국의 도교와 결합되어 성립되었다. 당나라 말엽에 예수시왕생칠경(預修十王生七經)이 편찬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화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 때 유입되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했다.

예수시왕생칠경에 따르면, 망자는 사후 초칠일(初七日)에 진광대왕, 이칠일(二七日)에 초강대왕, 삼칠일(三七日)에 송제대왕, 사칠일(四七日)에 오관대왕, 오칠일(五七日)에 염라대왕, 육칠일(六七日)에 변성대왕, 칠칠일(七七日)에 태산대왕, 100일째는 평등대왕, 1년째는 도시대왕, 3년째는 오도전륜대왕에게 차례로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망자는 그 결과에 따라 육도(六道), 즉 하늘·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 중 한 곳에 다시 태어난다. 
 

109×75cm 크기 비단위에 채색된 흥국사 시왕도 중 제5 염라대왕도.
109×75cm 크기 비단위에 채색된 흥국사 시왕도 중 제5 염라대왕도.
제5 염라대왕도 부분. ‘발설지옥’과 ‘업경지옥’이 표현되어 있으며, 말 타고 오는 명부 사자의 모습도 보인다.
제5 염라대왕도 부분. ‘발설지옥’과 ‘업경지옥’이 표현되어 있으며, 말 타고 오는 명부 사자의 모습도 보인다.

흥국사 시왕도는 세로 109cm, 가로 75m의 비단에 붉은색, 녹청색, 군청색을 위주로 채색되어 있으며 그 외에 백색과 황토색계열도 일부 사용되었다. 전체적으로 색이 맑고 선명한 것으로 보아, 양질의 안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기에 따르면, 건륭 57년인 1792년 윤4월24일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5월26일에 점안했다고 한다.

그림은 당시 서울·경기의 대표 화사인 연홍(演弘)스님, 경욱(慶郁)스님 등이 그렸고, 관허설훈(寬虛雪訓)스님이 증명했다. 설훈스님은 10회 차에서 살펴본 홍천 수타사 <지장시왕도>(1776)의 수화사이기도 하다.

흥국사본의 화면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쪽에는 시왕을 중심으로 그 권속이 그려져 있고 아래쪽에는 지옥 장면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과 구도는 조선후기 시왕도의 보편적인 형식인데, 흥국사본도 이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 화면 상부에는 시왕의 존명과 해당 지옥의 명칭이 쓰여 있기도 하다. 

총 열 폭 중, ‘제5 염라대왕도’를 일례로 살펴보자면, 화면은 구름을 경계로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 있다. 화면의 상부에는 긴 수염을 늘어뜨린 염라대왕이 앉아 있고 그 앞으로는 각종 문서와 기물들이 놓여 있다. 염라대왕의 앞에는 판관(判官)이 고개를 숙인 채 망자의 심판 내용을 전달받고 있다. 대왕의 양옆으로는 권속들이 그 얘기를 경청하고 있다.

화면 하부에는 망자의 신상이 담긴 서류를 들고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명부 사자(使者), 죄업이 적힌 문서를 보여주고 있는 판관과 이를 확인하는 옥졸, 그리고 그 내용에 따라 벌을 집행하는 옥졸과 망자가 그려져 있다. 망자는 몸이 기둥에 묶인 채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으며 옥졸이 채찍을 휘두르며 그 위에서 소를 몰아 쟁기로 갈고 있다.

이는 ‘발설지옥(拔舌地獄)’을 표현한 것이다. 발설지옥이란 때론 경설지옥(耕舌地獄)이라고도 불리며, ‘혀가 길게 뽑히는 고통’을 의미한다. 평소에 남을 비방하고 욕하는 등 구업(口業)을 지은 이들이 죽으면 이러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그 위로 일부 망자들은 형틀을 쓴 채 본인들의 생전의 과보(果報)를 거울을 통해 다시 보고 있다. ‘업경지옥(業鏡地獄)’이다. 거울 속 모습은 소를 때려잡고 있는 장면으로, 축생을 괴롭힌 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흥국사 시왕전 내 지장삼존상 옆에는 업경대(業鏡臺)가 실제로 올려져 있다. 

다음으로 ‘제8 평등대왕도’를 보면, 화면 상부에는 평등대왕이 수염을 만지며 판관이 읽은 망자의 죄업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탁자에는 서류 꾸러미와 도장 등이 놓여 있다. 화면 하부에는 ‘거해지옥(鉅解地獄)’이 그려져 있다. 산채로 몸이 잘리는 고통에 비유된 지옥이다. 벌을 받는 중인 망자의 앞에는 다음 차례의 망자들이 옥졸에게 끌려오는 모습도 확인된다.

그 외에도 흥국사 시왕도의 다른 화폭에는 얼음산에서 추위에 떠는 고통에 비유한 ‘한빙지옥(寒氷地獄)’, 산 채로 못 박히는 고통의 ‘철상지옥(鐵床地獄)’, 어둠의 고통을 의미하는 ‘흑암지옥(黑暗地獄)’ 등 각종 지옥이 표현되어 있다.

흥국사 시왕도는 한 화면에 많은 존상과 지옥 장면이 함께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존인 시왕의 성격과 풍모, 권속의 역할이 명확하면서도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각 지옥 장면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죄업을 짓지 말고 선하게 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저절로 전달되는 그림이다.
 

흥국사 시왕도 중 제8 평등대왕도.
흥국사 시왕도 중 제8 평등대왕도.

[불교신문3592호/2020년6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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