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불멸의 연구업적 남긴 선생 그리워”

연꽃 같은 역사 선생님 ‘蓮史’
한국역사와 불교가 곧 ‘홍윤식’

불교미술공모전 발의 창설하고
고려불화특별전 공동 주최하며
한국불교전통문화 우수성 알려

한·일 불교문화 비교연구가와
불교문화와 예술 발전 산증인
불교민속학자 등 찬사 마땅해

일생을 불교전통문화 계승과 선양에 힘써온 홍윤식 동국대학교 명예교수가 5월28일 세연을 다했다. 고인을 그리워하며 송재운 동국대 명예교수가 추모의 글을 본지로 보내와 전문을 싣는다.

불교전통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다 지난 5월28일 세연을 다한 고(故)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불교신문 자료사진.
불교전통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다 5월28일 세연을 다한 고(故)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불교신문

연사(蓮史) 홍윤식 선생! 한 떨기 연꽃처럼 모든 속진(俗塵)을 떨쳐버리며 맑고 아름답고 고운 향을 품고 사시던 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습니다. 향원익청(香遠益淸)이라 선생께서 가시고 나니 생전 선생의 다정스런 모습과 그 훈훈한 체향(體香)이 더욱 짙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일찍이 미천(彌天) 목정배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선생의 아호를 연사라 한 소이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이제염오(離諸染汚)하는 선생의 학구적 삶이 오죽 아름다웠으면 연꽃 같은 역사 선생님이라 이름 하였겠습니까! 모두가 공감하지요.

그리고 이 연사에는 또 한 가지 뜻이 더 있습니다. 바로 선생의 전공이 일반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와 그 문화란 점에 주목 한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역사분야보다 몇 배 이상 더 심혈을 쏟아 평생 연구해 오신 분야가 바로 한국불교와 그 문화 전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목정배 교수는 이 점을 높이 사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앞에 두고 다음 역사()를 뒤에 붙여 불교와 역사를 하나로 묶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와 불교가 바로 홍윤식이라는 거목에서 함께 자라고 꽃 피워 우리의 전통문화와 그 우수성을 이 시대 국내외에 새롭게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연사 선생! 선생은 1934년 경남 산청 지리산 자락 모례 마을에서 태어나 625전란 중이던 55년 당시 합천 해인사에서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과 같이 설립 운영하던 진주 해인농림고등학교(현 동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년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나왔습니다. 언젠가 제게 선생은 그 때 해인고등을 나온 것이 인연이 되어 동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후 고향 선배 박헌봉 선생이 교장으로 있는 국악예술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을 하면서 처음 불교 전통 음악인 범패(梵唄)를 접하고 차츰 우리 전통예술과 불교의례 그리고 불교미술 연구로 영역을 넓혀 가게 됐다고 술회했습니다. 선생의 국악예술고등학교 재직은 1970년대 초반까지 8년간 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선생은 범패와 불교의식 연구가로 이미 성장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이 됐고, 훗날엔 영예의 문화재위원에 올랐죠.

문화재 위원으로서 전국 민속과 불화(佛畵)를 조사연구했습니다. 한창 신바람이 날 때고 매스컴도 많이 탔습니다. 이때 저는 불교신문(당시 제호는 대한불교로 사업가 이한상 거사가 사장 재직 중) 기자로 있으면서 범패를 비롯한 선생의 큰 성과물들을 취재해 기사로 써 냈지요. 그리고 우리 둘이는 친해져 형제처럼 지내고 우의를 다지며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1960년대 중반 미모의 고등학교 여선생님을 제게 중매로 소개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근데 참으로 인생이 무상해 반세기가 훨씬 넘는 우리들의 생도 이제 금생의 인연은 일락서산(日落西山)이 되고 있네요.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생께서는 오늘 진 해가 또 내일의 태양으로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르듯 다시 오시리라고. 그래서 일락서산(日落西山) 이후 짝귀는 월출동령(月出東嶺)이지요. 이런 일월(日月)의 순환처럼 삼라만상이 불생불멸의 이요,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不來不去) 생사와 열반이 항상 같이 하는 것(生死涅槃 常共和<법성게>)이 인생 일진대, 그러니 선생 또한 가셔도 가신게 아니요 우리가 보내드려도 보낸 게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연사 선생! 30대 후반 선생은 일본 유학 이후 원광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각각 13년씩 모두 26년의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또 숱한 학문적 업적들을 차근차근 돌탑처럼 높이 쌓아 올리고 기라성 같은 후학들을 많이 키웠습니다. 선생은 1971년 일본 교토 불교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78한국불교 의례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원광대 사범대 국사교육과 전임교수는 그 이전 74년에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과로 자리를 옮겨 2000년 정년퇴임 때까지 박물관장, 문화예술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지요. 선생은 1969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불교 의식에 나타난 제신의 성격’ ‘불전상으로 본 불교음악’ ‘일 문화 구조와 역사관의 차이등을 필두로 무려 150여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고, 1973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불교의 연구> <한국의 불교미술> <극락도> <문화유산의 전통과 향기> <일 전통문화 비교연구> 30권 가까이 주요 저서를 썼습니다.

논문과 저술을 통해 본 선생의 학문적 예술적 업적을 분야별로 요약해 보면 한국사, 한국불교사, 한국 불교미술, 한국 불교의례, 불교전통음악, 일 불교문화 교류, 일 문화구조와 불교적 기반, 정토사상, 원불교사상 등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일견 상호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만 따져보면 하나 하나 모두 특수성을 지닌 전문 영역입니다.

그럼에도 선생은 타고난 천재적 재능과 참선 수행자와 같은 불퇴전의 정진으로 우리 같은 보통 학자들이 몇 생을 두고도 못해낼 연구업적들을 크게 이뤄 냈습니다. 그러므로 대한불교조계종 불자대상을 비롯해 여러 학술상이 선생에게 주어진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언론들은 선생을 두고 불교문화와 예술발전 계승의 산증인, 불교민속학자, 일 불교문화 비교연구가 등으로 호칭하는데 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1969년 조계종단의 연중행사로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치러지면서 불교미술의 신인 등용문이 된 불교미술 공모전을 발의 창설했고, 199311월 동국대 박물관장으로 재임 시에는 호암미술관과 공동 주최해 동국대학교 박물관 개관 30주년 기념전시를 열었죠.

당시 일본에 있는 국보급 이상의 고려불화를 선생이 혼자 힘으로 빌려와 호암미술관에서 고려 영원한 미()-고려불화 특별전을 열어 국내외 찬사와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 불화 전시로 고려불화가 중국 송대 쯤 그림으로 알고 있던 일본인들이 한국의 불화라는 점을 알게 됐고, 그 빼어난 예술미에 경천동지할 감탄을 자아냈다고 합니다. 이어 호암미술관에서는 이를 계기로 지속적인 고려 불화전을 갖게 됐습니다. 생전 선생은 이 두 전시 행사를 감동적으로 추억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잊지 않고 추도사에 올리며 그때 친견했던 수월관음도를 지금 떠 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사 선생! 이제 밤도 깊고, 지면도 다 차서 이 추도의 글은 여기서 마치렵니다.

아직 서천의 아미타여래가 계신 곳까지는 여정이 좀 남았지요! 찾아뵙거든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월출동령(月出東嶺)처럼 어서 이승으로 돌아오세요. 그래야 우리가 어디선가 또 만나지 않겠습니까!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송재운
송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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