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11> 통일신라불상② 불비상, 백제계 유민의 아미타정토변상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11> 통일신라불상② 불비상, 백제계 유민의 아미타정토변상
  • 배재호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 승인 2020.06.18 15:05
  • 호수 3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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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추모비에 불상과 발원문 새겨넣은 백제유민”

옛 백제땅 세종시 일대서 확인
우리나라서 유례 찾기 어려워
백제계 유민 정토신앙 반영

신라병합 후 백제 고위관료들
죽은 가족 극락왕생 발원하며
불비상 세웠다 기록 전해져

흑회색 납질편암 사용하고
조각기법이나 대좌형식 같아
하나의 장인집단이 조성한 듯

백제가 신라에 병합된 후 673년부터 689년 사이에 백제의 옛 지역인 세종시(충남 연기군)에서는 비석에 불상을 새긴 불비상(佛碑像)이 조성된다. 불비상은 세종시 전의면 비암사(碑巖寺)와 연서면(옛 서면) 연화사(蓮花寺), 공주시 정안면 서광암(瑞光庵)에서 모두 7점이 발견되었는데, 조성 초기부터 이들 사찰에 봉안된 것은 아니었다. 연화사 불비상들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쌍류리(雙流里) 절터(천생사지 혹은 생천사지)에서 가져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비상들은 원래 이 사찰에 함께 봉안되었다가 흩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석가모니불삼존상 및 천불상은 673년 조성. 높이 91cm,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석조석가모니불삼존상 및 천불상은 673년 조성. 높이 91cm,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불비상 중에서 석조석가모니불삼존상 및 천불상(673년), 석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7세기 후반), 석조계유명전씨(癸酉銘全氏)아미타불상(이하 전씨아미타불비상, 673년), 석조무인명(戊寅銘)아미타불상 및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무인명불비상, 678년), 석조기축명(己丑銘)아미타불상(이하 기축명 불비상, 689년) 등은 존명을 알 수 있다. 불비상은 죽은 가족과 칠세부모(七世父母)의 정토왕생, 즉 생천(生天)을 위해 추모비(追慕碑)에 불상과 발원문을 새긴 것이다.

불비상은 모두 흑회색 납질편암(蠟質片巖)으로 만들어졌으며, 조각 기법과 대좌 형식이 같아서 하나의 장인 집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씨아미타불비상에는 달솔(達率) 등 백제에서 고위 관료였던 사람들이 신라에 병합된 후 내말(乃末), 대사(大舍), 소사(小舍) 등 신라 관직을 부여받았던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서 불비상 조성의 주체가 백제계 유민임을 알 수 있다. 

불비상이 백제계 유민에 의해 조성되었지만, 백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형태라는 점과 기존의 백제불상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납질편암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전에 만든 적이 없던 불비상이 나타난 배경에는 분명 그것이 유행한 중국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왕경 금성(金城, 경주)이 아니라 왜 하필 이곳에서만 조성되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불비상은 지붕돌, 몸돌, 받침돌을 갖춘 전각(비석)형과 지붕돌, 받침돌이 없이 몸돌로만 된 연꽃잎 형으로 구분된다. 비록 표현 기법과 도상 구성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두 형식의 불비상은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조성되고 있으며, 그 속에 표현된 모티프들도 서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사천성(四川省)의 양나라 523년명 석조불군상(石造佛群像)과 하북성(河北省)의 북제 불비상에 보이는 앞뒤 존상들의 겹친 표현은 전씨아미타불비상에서, 산동성(山東省) 청주(靑州)의 북위와 북제 불상의 대좌에 표현된 커다란 용(龍)은 전씨아미타불비상의 옆면에서, 사천성의 남제(南齊) 483년명 불비상의 앞뒷면에 함께 표현된 미륵상과 아미타상은 무인명 불비상에서, 하북성 남향당산(南嚮堂山)석굴과 소남해(小南海)석굴의 아미타정토변상은 기축명 불비상에서, 6세기말 수나라의 금동불좌상에 보이는 수하(樹下)설법장면과 역 ‘출(出)’자 모양의 천개 드리개 장식은 석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좌대의 난간은 무인명 불비상 옆면과 기축명 불비상에서 각각 확인된다. 

중국의 남조, 북위, 북제, 수와 사천성, 하북성, 산동성 등의 불상은 기존의 백제불상에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는데, 불비상에서는 마치 전시대에 걸쳐 백제불상에 미친 중국 불상의 영향이 총망라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불비상은 백제계 유민에 의해 조성되었고, 백제불상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더라도 백제불상의 범주 속에서 보아야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추모적인 성향의 비석에 불상을 새긴 불비상 중에서는 7세기 후반 백제계 유민의 아미타정토신앙을 엿볼 수 있는 예가 3점 있다. 673년 4월과 5월에 전씨(全氏) 등이 국왕, 대신,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아미타불상, 관세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을 조성한 전씨아미타불비상도 이 중 하나이다.

앞면에는 아미타불삼존상과 함께 비구상 4존, 금강역사상 2존이, 옆면에는 윗쪽의 기락천(伎樂天,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 4존과 아래쪽의 용이 각각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화불(불좌상) 20존이 표현되어 있다. 아미타불상은 가부좌한 채 설법인을 결하고 있으며, 법의가 흘러내려 대좌를 덮고 있다. 
 

석조무인명아미타불상 및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678년에 조성. 전체 높이 70cm, 몸돌 높이 54.5cm, 받침돌 높이 17.5cm, 세종시 연화사 소장.
석조무인명아미타불상 및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678년에 조성. 전체 높이 70cm, 몸돌 높이 54.5cm, 받침돌 높이 17.5cm, 세종시 연화사 소장.

세종시 연서면 쌍류리 절터에서 옮겨온 연화사의 무인명 불비상에도 678년 7월7일에 “그 가족(其家‥)”을 위하여 조성한 아미타불상이 표현되어 있다. 앞면에는 사자가 표현된 방형대좌 위에 가부좌한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입상의 보살상과 제자상이, 양 옆면에는 윗부분의 불상과 아랫부분의 난간이, 뒷면에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협시보살상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불비상은 앞면의 아미타불상과 뒷면의 미륵보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미타불상의 위쪽과 양옆에는 천개(天蓋) 장식과 드리개가, 대좌 아래쪽에는 凹식 구도 속에 서방극락정토의 칠보연지(七寶蓮池)와 넓고 큰 연잎이 일렁이는 물결 속에 표현되어 있다. 불상 두광(頭光)의 12개로 이루어진 짧고 넓은 연꽃잎은 백제 연화문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뒷면의 미륵보살상은 반가사유상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예로서,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상체엔 천의를, 하체엔 치마(군의)를 입고 있다. 왼발은 내려뜨렸으며, 왼손으로 왼쪽 다리 위에 올린 오른발 발목을 잡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 위에 두었다. 마모가 심하여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넓고 각진 어깨와 가는 허리, 양감 있는 상체를 가지고 있다.

보살상은 앞면의 아미타불상과 같이 2개의 테두리선으로 구획된 원형의 두광을 하고 있으며, 안쪽에는 16개의 연꽃잎으로 이루어진 연화문이 표현되어 있다.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의 조합은 서방극락정토와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거나 7세기 후반 불교 신앙의 중심이 미륵불에서 아미타불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암사에 있었던 기축명 불비상은 전씨아미타불비상과 무인명 불비상보다 많은 내용을 앞면에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다. 뒷면 윗부분에 앞면의 아미타정토 변상(變相, 경전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불상과 불화 형식으로 바꾼 것) 장면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해서체로 689년 2월15일에 칠세부모를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한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아미타불이 서방극락정토에서 설법하는 것을 나타낸 아미타정토 변상은 아래위를 凹식으로 4등분한 다음 조감도식으로 표현하였다.
 

석조기축명아미타불상은 689년 조성, 높이 57.8cm.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석조기축명아미타불상은 689년 조성, 높이 57.8cm.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제일 아래쪽에는 격자 모양의 난간이 있고, 그 가운데에 계단이 나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아미타불과 극락정토가 펼쳐진다. 아미타불의 양옆에는 설법을 듣는 제자, 보살, 금강역사가 서 있으며, 그 앞에는 연화 향로를 중심으로 팔공덕수(八功德水)와 연꽃이 있는 칠보연지가 있다. 연지 양옆에는 꿇어앉은 공양보살과 웅크린 사자가 가운데를 향하고 있다. 두 마리의 사자 꼬리 뒤쪽에서 솟아 나온 연꽃 위에는 보살 모습의 존상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마주 보고 서 있다.

불상 왼쪽의 존상은 오른손을 얼굴 앞까지 들어 올려 보궁(寶宮)을 받쳐 들고 있으며, 왼손을 허리 옆에 두어 보주 모양의 지물(持物)을 잡고 있다. 반대편에 있는 오른쪽 존상은 왼손으로 보궁을, 오른손으로 허리 옆에서 지물을 들고 있다. 보궁 속에는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문수보살상의 대담 장면을 연출한 듯 마주 보고 앉아서 손을 앞으로 내민 존상이 표현되어 있다. 그 바깥쪽에는 근육질의 정강이를 드러낸 금강역사상이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다. 극락정토의 하늘을 표현한 불비상 위쪽은 많이 부서져 화불과 극락보수(極樂寶樹) 등 일부 도상들만 확인된다.

기축명 불비상이 670년대의 전씨아미타불비상과 무인명 불비상과 다른 점은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두 불비상이 아미타불의 설법 장면만 표현하였다면, 기축명 불비상은 설법 장면은 물론 서방극락정토까지 구체적으로 나타내었다.

이러한 양상은 7세기 후반 당나라에서도 나타나는데, 아미타불상 만이 아니라 서방극락정토까지 표현한 낙양의 용문석굴 북시채백항정토당(北市綵帛行淨土堂)과 서방정토변상감(西方淨土變相龕)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불비상은 신라에 병합된 후 백제의 고위 관료 전씨 등이 지금의 세종시 연서면 쌍류리 부근에서 살면서 칠세부모와 죽은 가족의 생천을 기원하며 조성한 것으로서, 7세기 후반 백제계 유민의 정토신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석조계유명전씨아미타불상도 673년 조성. 높이 43cm, 폭 27.6cm, 두께 17cm 크기.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석조계유명전씨아미타불상도 673년 조성. 높이 43cm, 폭 27.6cm, 두께 17cm 크기.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불교신문3590호/2020년6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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