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藍과 뫼] ⑨ 경주 남산과 불교 유적
[伽藍과 뫼] ⑨ 경주 남산과 불교 유적
  • 박부영 주필
  • 승인 2020.06.14 11:48
  • 호수 35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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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극락 세계 연화장 세계 구현한 ‘겨레의 땅 부처님 땅’
위풍당당한 용장사 삼층석탑, 발 아래 경주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위풍당당한 용장사 삼층석탑, 발 아래 경주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주 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많다. 
어느 곳에서 출발하던 계곡 곳곳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저절로 고개 숙여 예배 올린다. 
바위에 그린 듯 새긴 부처님, 
목 잘린 부처님, 
위풍당당한 석탑을 보고 합장 삼배하고, 
정상에 서면 발 아래 펼쳐진 
내가 올라온 세상을 보며 
또다시 부처님 은혜에 감사한다. 
남산은 그런 곳이다.

삼릉골 마애여래불.
삼릉골 마애여래불.

 

◇ 삼릉 계곡의 부처님들 

이른 아침인데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넓은 길이 나 오르내리기 편했다. 삼릉을 벗어나자마자 흩어져 있던 석조물이 전시돼 있다. 조금 더 가자 목 없는 석불좌상이 앉아있다. 계곡에 묻혀있던 것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 사실적이며 기백이 넘치고 단정하면서 의연하다. 불상 얼굴 표정도 이와 같았으리라.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40m 쯤 올라가니 높이 솟아오른 돌기둥 위에 왼손에 정병을 들고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높이는 약 1.55m다. 역시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삼릉골에 있다 해서 삼릉골마애관음보살상이라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자 계곡 건너 넓은 터에 큰 바위 두 기가 나온다. 마애선각육존불상이다. 앞 뒤로 솟은 큰 바위에 붓으로 그린 듯 불상이 뚜렷하다. 높이 2.65m의 본존불 입상과 1.8m의 협시보살 좌상이다. 협시보살이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 올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뒤 쪽 바위에 새긴 삼존불은 본존이 좌상이고 두 협시보살이 입상이다. 높이가 각각 2.4m, 2.6m다. 거친 바위 표면 그대로 조각이 아니라 붓으로 그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선이 놀랍다. 

가는 걸음이 더디다. 200미터 쯤 올라가는데 광배를 단 당당하고 위엄 있는 표정의 석불좌상이 나온다. 삼릉골 석불좌상이다. 시멘트로 대충 발라 흉측하던 불상을 보수하고 본래 자리를 발견하여 제 자리에 안치했다. 석불 아래에는 삼층석탑이 있었다. 석탑은 1930년 일제시대에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는 표식만 있다. 석불좌상은 보물 제666호다. 

다시 300m 위 쪽으로 가면 선각여래좌상이 나온다. 10m 쯤 되는 절벽 중앙에 난 수평 금을 좌대삼아 새긴 여래좌상이다. 얼굴만 돋음새김 해서 위엄 있는 얼굴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작품으로 추정한다. 
 

삼릉골 석불좌상 모습.
삼릉골 석불좌상 모습.

◇ 남산에서 제일 높은 곳 상선암

평탄하던 길이 경사가 조금씩 급해지는 지점에 봉축등이 반갑게 맞이한다. 저 위에 절이 보인다. 남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상선암이다. 남산 불상 중 가장 크고 조각이 우수하다는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을 모신다. 안타깝게도 가는 길이 막혀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상선암 위 능선에 올라 금오봉을 향해 가는데 마애불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산 아래 넓은 들이 내려다 보이는 암벽에 크고 당당한 자세로 속세를 내려다 보고 섰다. 세상의 온갖 액난을 다 물리쳐 줄 것 처럼 든든하다. 

걸음을 옮기자 마자 또 발을 붙잡는다. 주름이 많은 큰 바위가 우뚝 솟았는데 그 아래 직사각형 구멍이 나있다. 그 아래 1m도 안되는 작은 불상이 서있다. 머리는 없고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붙였다. 바위 이름이 상사암(想思巖)이다. 불교와 무속이 결합한 남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상사병에 걸린 이들이 빌면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신라시대부터 후손을 얻기 위해 복을 빌던 곳이라고도 전한다. 

남산 곳곳에 무속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서있다. 무속인 만이 아니다. 무덤은 그 보다 훨씬 많다. 개인과 가문의 영달을 기원하며 조성했을 무덤이 산 곳곳에 남아있다. 이장(移葬)을 알리는 푯말이 무속 금지 푯말 보다 훨씬 많다. 자연을 그대로 살려 돌에 새긴 불상에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온 나라 백성의 안위와 평안을 기원하는 공동체 마음이 담겼다.

그래서 천년 세월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남산을 오가는 사람들을 수호하고 사랑 받는다. 반면 무덤은 이제 찾는 사람도 보호하는 사람도 없어 발 아래 밟히고 강제로 파헤쳐져 쫓겨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남산은 그런 점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보여주는 스승이다. 
 

상선암 전경.
상선암 전경.

◇ 남산에서 가장 깊고 큰 용장골 

해발 468m 금오산 정상에 섰다. 경주 시내 여러 방향에서 올라온 시민들이 이곳 저곳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정상에서 약수골로 내려갔다. 길이 아주 가파르다. 거의 수직에다 암벽이 가로막아선 모양이 삼릉골의 평탄한 길과 전혀 다르다. 이 골짜기에 절터가 여섯 군데 불상 둘 석탑 한기가 있다. 마애여래대불입상을 보러 가는 길이다.

아래로 내려가는데 나이 든 부부가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다 인사한다. “아주 일찍부터 오셨다”는 인사에 웃으며 목례하고 내려갔다. 가파른 계단을 한 참 내려가자 대형 마애불이 보인다. 남산 마애불 가운데 가장 크다. 몸체 높이가 8.6m, 폭이 4m다. 바위 한 면을 전부 불상으로 조성했다. 머리만 다른 돌을 조각해서 얹었는데 안타깝게도 없어져 목 아래 바위에 새긴 부분만 볼 수 있다. 그래도 환희심이 절로 우러난다. 

다시 가파른 약수골을 올라 금오봉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내려갈 때 만난 노부부가 깜짝 놀라 “도대체 어디로 가냐”며 묻는다. 웃으며 “마애불이 하도 장엄하다길래 보고 왔습니다”하며 용장골로 향했다.  

용장골은 고위봉과 금오봉 남산을 대표하는 두 봉우리 사이에 난 계곡 답게 가장 깊고 크다. 신라 경덕왕 때 고승 태현(太賢)과 조선시대 생육신 김시습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용장사터가 이곳에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태현은 용장사에 살면서 석조장륙상을 모셨다. 대사가 불상 주위를 돌며 예를 올리면 불상도 또한 대사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용장사가 기억하는 또 한 명의 위인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세종이 감탄한 천재소년 김시습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에 흠취해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을 짓고 출가했다.

세조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읽던 책을 불태우고 승려가 된 설잠은 10년간 전국을 떠돌다 31살에 이 곳 용장사(茸長寺)에 자리를 잡았다. 토굴을 짓고 그 앞에 매화를 심었다. 아마 남쪽 지방을 떠돌며 매화를 만나 매력에 빠진 듯 하다. 용장사에서 그는 이런 시를 지었다. 

“용장골 깊어 오가는 사람 없네/ 보슬비에 신우대는 여울가에 움돋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희롱하는데/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네/의자에 먼지가 재처럼 깔렸어도/깰 줄 모르네 처마 밑에서 들꽃은 떨어지고 또 피는데”

매화를 사랑해서 호를 매월당(梅月堂)이라 지었다. 수락산 아래 수락정사를 짓고 살 때는 동봉(東峰)이라 하고, 부여 무량사에서 열반에 들기 전 말년에는 청한(淸寒) 이라 짓는 등 여러 호가 있었지만 매월당으로 대표된다. 한문단편 소설 ‘금오신화’도 이 곳에서 저술했으니 용장사가 결코 잊지 못할 큰 위인이다.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대불.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대불.

◇ 용장사지의 석탑과 불상

용장골은 삼릉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화강암 바위 투성이에다 가파른 수직 절벽이다. 한발 한 발 온 정신을 다해 딛지 않으면 천길 낭떠러지다. 발 아래는 벌판이 펼쳐진다. 탁트인 전망에 바위 투성이 계곡으로 된 용장골은 남산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한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 펼쳐진다. 바위 절 벽 위에 석탑 한기가 천지를 내려다 보고 서 있다. 마치 성 위에서 적군을 내려다 보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하다. 높이는 4.5m로 그리 크지 않지만 위엄이 대단하다.

자연암석 위에 바로 상층기단을 세웠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명작이다. 남산에 조성한 불상 탑이 모두 이런 식이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살렸다. 자연과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인공물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한참을 앉았다 섰다 하다가 할 수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자 마자 이번에는 목 없는 불상이 맞이한다. 그 옆 암벽에는 여래불이 새겨져 있다. 마애여래좌상은 보물 제913호이며 목 없는 석불좌상은 제187호다. 삼층석탑도 보물이니 이 계곡 10m 아래 위로 보물만 세 점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용장사 미륵장륙상으로 추정하는 석불좌상은 자연석 기단에 둥근 모양의 간석과 대좌를 앉힌 것이 특이하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마치 탑처럼 쌓아올리고 그 위에 불상을 앉힌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태현대덕이 염불을 하며 불상 주위를 돌면 불상도 함께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그 불상이 아닐 까 생각했다. 

용장사 터에는 등산객들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터를 내려서자 마자 조릿대 숲이 나온다. 매월당이 시에서 언급한 신우대가 바로 조릿대다. 대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니 설잠교가 나온다. 설잠교에서 다시 남산으로 오른다. 지루한 계곡을 한참이나 올라가자 뜻밖에 호수가 나온다. 산 높은 곳에 호수가 있어 놀랍다. 

호수 위가 고위봉에서 금오봉으로 가는 길목 백운재다. 백운재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 금오봉이며 그 오른쪽이 고위봉이다. 칠불암으로 가려면 금오봉 방향으로 가야한다. 봉화대가 있던 능선이어서 이름이 봉화골이다. 용장계곡과는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토함산과 낭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역시 암석 투성이 가파른 절벽이다. 

칠불암으로 조심 조심 내려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조그만 길이 나 있다. 신선암 가는 길이다. 돌출된 바위면을 다듬어 감실을 파고 이를 광배삼아 새긴 마애불이 나온다. 보관을 쓴 보살상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은 듯하다. 편안하게 앉아 지긋이 세상을 바라보는 마애보살상은 남산을 상징한다. 보물로 지정돼 있으며 한 명이 간신히 절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만 남겨두었으며 철책을 둘러 추락 위험을 방지했다. 바로 아래 천길 절벽이다. 
 

칠불암.
칠불암.

◇ 신선암 마애불, 四面佛 모신 칠불암

신선암 마애불을 나와 다시 암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칠불암이 나온다. 칠불암 입구에 마애석불이 먼저 반긴다. 칠불암 이름은 이곳에 조각된 사면불과 삼존불을 합한데서 연유한다. 높은 절벽을 등진 뒤쪽 자연암석에 삼존불이 있고 그 앞쪽 네면에 불상이 조각된 돌기둥이 솟아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사면불이다. 국보 312호로 지정돼 있다. 

등산화를 벗고 참배한 뒤 절 앞으로 가니 비구니스님이 반갑게 웃으며 커피 한잔 하라고 청한다. 무료라고 적혀있다. 준비해간 생수가 떨어져 약수터를 찾으니 스님이 얼음에 시원하게 얼린 물을 주신다. 큰 생수통에 담긴 얼음물을 마시고 빈 물통에 담았다. 불상 주변을 청소하던 신도분이 야단을 친다. “여기도 물이 나오지 않아 아래서 올 때 지고 오는데 산에 오는 사람이 물을 넉넉하게 준비해와야지”라며 타박하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음 행선지는 열암곡이다. 조계종이 백만원력결집불사 차원에서 진행하는 열암곡 마애불 세우기의 그 불상이다. 열암곡으로 가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한다. 백운재로 가지 않고 곧바로 가면 열암곡이다. 그곳은 유적이 많지 않고 인적이 드물다. 지진으로 넘어져 숨어있던 불상을 600년간 발견하지 못한 이유다. 그래서 온존히 보존할 수 있었지만. 

열암곡으로 내려가는데 좌불 한기가 보인다. 지도에 나온 위치와 다르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주변을 서성이는데 검은 천막 안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나온다. 열암곡 마애불이 어디 쯤이냐고 물으니 이곳이 처음이냐고 묻는다. 그렇다 하니, 웃으며 “그러면 저를 참 잘 만났다”며 “여기서 30m 쯤 가면 된다”며 천막을 가리킨다.

등산앱이나 지도에는 열암곡 마애불이 석불좌상과 떨어져 있었는데 바로 이 곳이라니 지친 몸이 되살아 날 정도다. 이 지역을 담당하며 주로 열암곡 마애불을 지키고 찾아오는 사람들 안내를 맡고 있다고 한다. 열암곡 마애불수호신장이다. 그는 종단이 나서 다시 세운다는 마애불을 수호하는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안내 덕분에 누워계신 부처님을 친견하고 얼마 전 복원한 좌상도 함께 예배했다.
 

칠불암 마애석불.
칠불암 마애석불.

◇ 부귀 사랑보다 부처님 택한 여인의 佛心

조금만 내려가면 마을이다. 그런데 택시도 오지 않아 시내로 나가기 힘드니 차라리 다시 올라가서 금오봉으로 가거나 용장골로 내려가는 편이 낫다고 한다. 벌써 몇 번 째 계곡을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다시 올라갈려니 망설여졌다. 더군다나 이제 그늘이 드리울 시간이다. 결국 다시 올랐다. 백운재로 가서 이번에는 고위봉에 올라 열반재로 갈 계획이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올 때는 지나쳤는데 봉화대능선에서 칠불암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터를 발견했다. 다시 오지 않았으면 모를 뻔 했다. 

고위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두 갈래다. 하나는 암벽이 솟은 이무기능선이고 다른 하나는 열반재로 가서 관음암으로 가는 길이다. 열반재를 택했다. 그 곳 역시 내려가는 길은 깎아 지른 절벽이다. 내려가면서 원로의원 도문스님께서 발원한 천룡사 복원 불사 현장을 보고 싶기도 했다. 

열반재 유래가 감동이다.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여인이 뭇 사내들의 청혼을 물리치고 사랑 존경 부귀 화려한 옷 맛있는 음식 등 세속의 온갖 잡사를 끊고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해 열반에 들었다고 해서 열반재다. 그 사연이 열반재 아래 관음암 바위에 스며있다.

여인의 불심이 어디 열반재에만 남았겠는가? 남산 전부가 그 여인 처럼 번잡한 속세를 버리고 부귀 영화도 던지고 영원한 행복 진리를 찾아든 이들의 쉼터며 안식처다. 매월당,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 선생이 그러하며 오늘도 남산을 오르내리는 경주시민들의 마음이 또한 그와 같다.

경주 남산=박부영 주필 chisan@ibulgyo.com
 

남산 안내지도.
남산 안내지도.

◼ 경주 남산과 불교

“신라인의 이상세계 남산”

경주를 상징하는 남산(南山)은 원래 이름이 ‘금 자라’, 금오산(金鰲山)이다. 월성에서 바라 보면 자라 머리가 월성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형국이라고 한다. 경주 진산(鎭山)은 낭산(狼山)이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도리천으로 여겨 이곳에 능을 조성했다. 낭산 남쪽에 있어 남산이라고 부른다. 

남산은 경주 평야에서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있다. 남북이 8km, 동서가 4km 가량이다. 두 봉우리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데 해발 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高位山)이다. 고위산 원래 명칭은 수리산이다. 수리는 으뜸 머리라는 뜻을 지닌 우리 말이다. 고산(高山)이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은 경주 평야에 우뚝 솟은 이 산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우러렀던 것이다. 

두 봉우리에서 흘러 내린 능선과 골짜기가 64곳에 이른다. 신라인들은 이중 60 골짜기에 절을 짓고 바위에 불상을 새겼다. 확인 된 절터가 100곳이 넘고, 석불 60여구, 석탑 40여기다. 50여 계곡과 능선 중 21곳에 모두 200여 종류의 불교 유적을 남겼다. 신라인들은 이곳에 부처님의 나라를 구현하려 했다. 그 기간이 무려 400년이다. 6세기인 신라 진흥왕대부터 시작하여 고려까지 지속됐다. 

남아있는 당대 사찰은 거의 없고, 대부분 근래 들어 새로 조성했다. 삼존석불입상을 모신 삼불사, 백운재 쪽의 백운암, 탑골의 보리사, 서출지의 무량사, 열반재 아래 한창 불사 중인 천룡사 등이 그렇다. 

신영훈 선생은 남산을 일러 이렇게 말했다. “경주 남산은 신라불교인들의 이상세계이기도 하고 수미산이기도 하였다. 불국사에 사바세계와 극락세계 연화장 세계를 구현하였듯이 남산을 영산으로 조형하려 욕심 부렸다.”<경주남산, 조선일보사>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리는 윤경렬 선생은 남산을 연구한 책 이름을 이렇게 달았다. ‘겨레의 땅 부처님 땅’.

‘부처님 땅’ 남산은 1971년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로 지정된 이후 85년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었고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민족의 문화보고 불국토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봉화능선에서 바라본 칠불암과 낭산 토함산 일원.
봉화능선에서 바라본 칠불암과 낭산 토함산 일원.
열암곡 석불좌상과 마애불 현장 모습.
열암곡 석불좌상과 마애불 현장 모습.

◼ 열암곡 마애불

600년만에 다시 일어서는 부처님
‘5cm 기적’ 종단 종도들이 잇다

2005년 10월23일 평소 경주 남산을 사랑하며 문화재에 관심이 많던 경주남산연구소의 두 회원이 열암곡 석불좌상 일대를 답사하던 중 석불좌상이 놓인 구릉 약 40여m 아래에서 불두(佛頭) 한 점을 발견했다. 임희숙 배만수 두 회원은 이 사실을 경주시에 신고했다. 

경주시는 현장을 확인하고 열암곡석불좌상과 연관성을 조사할 것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요청했다. 확인결과 목이 잘린 열암곡석불좌상에서 떨어져 나간 불두임이 드러났다. 경주시는 2006년3월 유적 조사를 위한 발굴 및 정비사업을 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는 등 사전 단계를 거쳐 이듬해 3월22일부터 유적 일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발굴조사가 시작되고 두 달이 지난 5월25일. 석불좌상이 있던 축대 상부 동선이 불분명하여 축대 주변을 면밀히 살피던 조사단 눈에 큰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석불좌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30도 경사진 곳에 위를 향해 엎어져 있는 바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주변에는 암석들이 산재해 있었다. 열암곡 마애불상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무게 약 80톤의 화강암의 한 면을 이용하여 부조(浮彫), 즉 돋음새김한 불상은 머리에서 발끝까지가 460cm, 연화대좌가 100cm, 전체 높이가 560cm에 이르는 대형불상이었다. 부처님 정수리에 불룩 솟아오른 육계가 높고 민머리에 타원형 얼굴,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 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이 뚜렷한 잘생긴 불상이다. 마애불을 조사한 조사단은 이 불상이 8세기 후반 경 조성된 것으로 삼화령 삼존불 배리삼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잇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했다. 

가장 놀라운 점은 땅에 엎드려 누워있었는데 전혀 손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확인 결과 1430년 경주 일원에 닥친 강진(强震)과 홍수로 넘어져 흙에 묻힌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그 자리에서 바로 위쪽으로 넘어져 손상이 없었다. 게다가 땅바닥에 완전히 닿지 않고 5cm를 남겨두고 공중에 뜬 상태여서 얼굴 부위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우리 언론은 앞 다퉈 조사 결과를 보도했는데 다들 머리 잃은 석불좌상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 몽드’가 ‘5cm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이 마애불상이 기적처럼 600여년 간 그대로 보존된 것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이 후 우리의 관심도 이 마애불상으로 옮아갔다. 문화재청은 이 불상을 다시 세우려 했지만 지정문화재가 아니어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포기한 상태였다.

그리고 2008년 조계종 총무원장에 오른 원행스님이 한국불교 미래를 준비하는 대 비전을 제시하는데 그 중 하나가 열암곡마애불을 다시 세우는 불사였다. 이를 계기로 마애불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기금 행렬에 동참하는 불자들이 늘어났다. 
 

열암곡 마애불.
열암곡 마애불.

[불교신문3588호/2020년6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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