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철 미국 드루大 연구원 제공

1923년 이화학당 학생 교사 방문
기둥에 붙인 주련 글씨도 선명해
대방 위 화엄회 법화회 이채로워

1923년 여학생들이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지금의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개운사를 방문해 촬영한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임연철 미국 드루대 아카이브 연구원(전 동아일보 기자)은 미국에서 수집한 30여 장의 일제강점기 불교 사진을 본지에 제공했다. 20세기 초 조선불교계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들이다. 임연철 연구원이 제공한 1910년대 전후 조선 스님과 봉은사, 관촉사, 옥천암 등 다수의 근대불교 사진도 보완취재를 거쳐 보도할 예정이다.

1923년 5월26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지금의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 자리한 개운사를 찾은 이화학당 학생과 교사들. 사진제공 = 임연철 미국 드루대 연구원.
1923년 5월26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지금의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 자리한 개운사를 찾은 이화학당 학생과 교사들. 사진=임연철

1923년 5월26일 토요일. 주말을 맞은 한복(교복)을 차려입은 이화학당 학생 97명이 개운사를 찾았다. 사진 아래 부분에 영문으로 쓴 메모를 통해 방문 날짜를 확인할 수 있다. 남교사 7명과 여교사 6명도 함께 했다.

학생들의 연령은 10대 초반 어린 소녀부터 20대 초반 숙녀까지 다양했다. 남교사들은 중절모를 쓰고 넥타이를 맨 신사복 차림으로, 몇몇은 짧은 머리에 가르마를 탔다. 단정한 단발머리 여교사들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1923년 6월2일 동아일보에 의하면 당시 이화학당 재학생은 300명이었다. 따라서 개운사를 방문한 이화학당 학생들은 전교생의 3분의 1이다.
 

1925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의 ‘녹음 등지고 말하는 사진’이란 제목의 기사에 실린 개운사 전경.
1925년 6월17일자 동아일보의 ‘녹음 등지고 말하는 사진’이란 제목의 기사에 실린 개운사 전경.

임연철 연구원이 본지에 공개한 사진은 촬영 시기가 확실하게 표기된 가장 오래된 개운사 자료이다. 교사와 학생뿐 아니라 현판과 기둥에 붙인 주련이 보이는 첫번째 사진이다. 가운데 주련은 글씨가 선명하고 건물 좌우측 주련은 일부가 가려있지만 윤곽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오른쪽부터 ‘山色淡隨僧入定(산색담수승입정) 無我無人觀自在(무아무인관자재) 非空非色見如來(비공비색견여래) 松風靜與客談玄(송풍정여객담현)’이다. 개운사에 현존하는 주련과 위치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다.

이채로운 것은 대방(大房) 문 위쪽의 ‘法華會(법화회)’와 ‘華嚴會(화엄회)’라는 글씨이다. 종이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 확인된 사례이다.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스님은 “특이하고 귀한 사진”이라면서 “예전에는 학인들이 공부하는 강당(講堂)에서 화엄반(班)을 화엄회로, 법화반(班)을 법화회로 표기하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박한영(朴漢永, 1870∼1948) 스님이 1926년 개운사 대원암에 불교전문강원을 개원했으니 촬영 시기와는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지안스님은 “그렇다면 개운사에서 만든 재가불자들의 신행단체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향후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1923년 사진에서 보이는 ‘비공비색견애래’이라고 쓴 주련으로 현존한다.
1923년 사진에서 보이는 ‘비공비색견애래’이라고 쓴 주련으로 현존한다.

이 사진에는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쓴 개운사 현판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학생들 머리 위에 있는 현판은 사라지고 없지만 ‘화엄회’와 ‘법화회’ 글씨 사이에 있는 현판은 지금도 남아있다. 기존에 알려진 1922년 사진에는 글씨의 형체가 분명하지 않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 왼쪽 끝에 일부 보이는 박대은신(朴大恩信)의 ‘石壽老池(석수노지)’ 현판은 현존한다.

일제강점기 동대문 밖에 자리한 개운사는 경성 주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1925년 6월 17일 동아일보는 ‘녹음(綠陰) 등지고 말하는 사진(寫眞)’이란 코너에서 개운사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역사 등을 말하는 형식으로 보도했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개운사를 방문한지 2년 뒤 사진이다.

이에 따르면 인명원(仁明院) 후신인 영도사(永導寺)를 나라에서 폐사시키자, 인파(人波)스님이 ‘쫓겨난 부처님’을 모시고 헤매다 (197년 전) 지금 자리에 절을 세워 개운사(開運寺)라고 했다. 1921년에는 1만8000원을 들여 중수했다.

동아일보는 그 이전의 개운사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삼계중생을 깨우치는 종소리가 한 번씩 떼~엥하고 울리매 울울창창한 솔밭 사이로 그 소리가 멀리 멀리 퍼지어 인근 산촌의 농사짓는 백성들은 물론 10리를 격(隔, 떨어진)한 문(門, 동대문)안 사람들까지 불덕(佛德, 부처님 공덕)을 사모하야 나를 찾아오는 선남선녀가 문턱에 닿았습니다. 그때야말로 극락세계가 내 앞에 이루웠지요.”
 

박한영 스님이 근대교육을 위해 불교전문강원을 개원하고, 종단이 스님들의 현대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중앙승가대학교와 인연이 깊은 개운사 전경.
박한영 스님이 근대교육을 위해 불교전문강원을 개원하고, 종단이 스님들의 현대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중앙승가대학교와 인연이 깊은 개운사 전경.

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은 “1930년대 초반 이화여전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윤치호, 여운형, 김성수 등과 함께 박한영 스님이 후원회에 참여한 인연이 있다”면서 “기독교에서 세운 학교이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박한영 스님 등 불교계가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동참한 것”이라고 말했다.

임연철 미국 드루대 아카이브 연구원은 이화학당 제5대 학당장(學堂長) 대리를 지낸 A.지네트 월터(1885~1977)의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개운사 등 근대불교사진을 입수했다.

그는 “A. 이지네트 월터가 1969년에 200부 가량의 자서전을 펴냈지만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진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룬 분”이라고 말했다.

이제네트 월터 증손을 통해 미국 콜로라도의 조그만 오두막 캐비닛에 보관돼 있는 자료를 확인했다. 한달음에 미국으로 달려가 200여 장의 사진과 엽서 등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이 가운데 불교 관련 자료를 불교신문을 통해 공개한 것이다.

한편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원종스님(서울 개운사 주지)은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옛날 개운사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면서 “한국불교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개운사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근대 개운사 확인한 소중한 자료”
중앙승가대 총장 원종스님

개운사 대각루 앞에서 97년 전 사진을 보고 있는 중앙승가대 총장 원종스님
개운사 대각루 앞에서 97년 전 사진을 보고 있는 중앙승가대 총장 원종스님.

“97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 촬영한 것처럼 현판과 주련이 선명하고 학생들의 표정도 생생하여 인상적입니다.” 중앙승가대 총장 원종스님(서울 개운사 주지)은 1923년 5월에 촬영된 개운사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원종스님은 “주련이나 석수노지 현판 등은 그대로 남아있고 대각루(大覺樓)도 크게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지되고 있다”면서 “격동의 세월을 겪으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개운사의 주지로서 마음이 새롭다”고 말했다.

스님은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 학생과 교사들이 경성 밖에 자리한 개운사까지 온 것을 단순하게 봐서는 안 된다”면서 “일제강점기 개운사가 불교뿐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1906년 4월 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정토종연구회’가 보통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할 때 개운사는 42원을 보조했다. 동참 사찰 31곳 가운데 봉원사, 흥천사, 두포사에 이어 네 번째이다. 박한영 스님이 근대교육을 위해 불교전문강원을 개원하고, 종단이 스님들의 현대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중앙승가대학교와 인연이 깊은 개운사가 20세기 초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원종스님은 “오래되고 귀한 개운사 사진을 공개해 준 임연철 연구원에게 감사드린다”면서 “선지식과 동량을 배출한 개운사의 영화를 되살리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가 생긴다”고 사진을 본 소감을 전했다.

“근대 불교자료에 관심 필요”
임연철 미국 드루대 아카이브 연구원

20세기 초 개운사 등 불교 사진 자료를 불교신문을 통해 공개한 임연철 연구원. 김형주 기자
20세기 초 개운사 등 불교 사진자료를 불교신문을 통해 공개한 임연철 연구원.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문화부 기자를 오래하면서 일제강점기 사진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임연철 미국 드루대 아카이브 연구원은 “A. 지네트 월터가 촬영한 사진과 엽서 등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과 당시 불교계를 짐작할 수 있다”면서 “불교 자료이기에 종단에서 발행하는 불교신문에 알리게 되었다”고 자료의 소중함과 공개 계기를 밝혔다.

임연철 연구원은 “스님들은 수행하는데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자료를 무념무상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면서 “20세기 초의 귀한 사진을 보면 불자들도 신심이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임연철 연구원은 중앙대에서 석사학위를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에서 문화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조계종 출입기자를 지내는 등 불교와 인연이 있다. 임연철 연구원은 “저를 아는 스님들이 이 기사를 보고 ‘별짓 다한다’고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언론사 퇴직 후에는 숙명여대 문화관광학과 초빙교수, 국립중앙극장 극장장을 지내고, 현재는 미국 드루대 아카이브 연구원으로 근대자료 수집과 회고록 등을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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