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12월 본지 인터뷰 당시 혜해스님 모습. 당시 세수 아흔을 한 달 앞둔 스님은 "한 평생을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아끼고 하심하며 살고 있다"며 “수행자는 공부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존재다. 공부만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2009년 12월 본지 인터뷰 당시 혜해스님 모습. 당시 세수 아흔을 한 달 앞둔 스님은 "한 평생을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아끼고 하심하며 살고 있다"며 “수행자는 공부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존재다. 공부만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불교신문

조계종 원로 비구니 보주당 혜해선사가 5월29일 오후9시30분 주석처인 경주 흥륜사 법기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랍 77년, 세수 100세.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태어난 혜해스님은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참선수행 하던 중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고, 북측에서 수행을 하기 힘들어지면서 1946년 10월 목숨을 걸로 38선을 넘어 남측으로 내려왔다.

금강산에서 경산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아 정진한 이래 해인사 효봉스님, 묘관음사 향곡스님 등 당대 최고승 회상에서 공부한 스님은 1970년대 경주 흥륜사에 주석하며 천경림선원을 개원했다. 1980년대부터 천경림선원 선원장을 맡아 결제 해제 가릴 것 없이 늘 20여 명의 수좌들이 모여 정진할 수 있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 대중을 외호했다.

혜해스님은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 당시 8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2004년부터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가량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했다.

출가 이후 세월은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한국전쟁, 정화, 근대화, 민주화로 변화를 겪었지만 스님은 80여 년 가까이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한치 어긋남 없이 실천해 왔다.

2009년 12월 본지와의 인터뷰터에서 “수좌란 공부 말고는 할 것이 없는, 아무런 쓸 데가 없다. 그래서 쓸 모 없는 돌처럼 산다고 해서 수좌를 일러 무위돌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어 “화두를 생명으로 삼고 화두를 놓치면 죽은 줄 알아야 한다”며 오직 공부에만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상좌 스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생불(生佛)’이라고 말했다.

“노스님은 지금도 아침 점심 저녁 예불을 빠트리지 않고 발우공양도 함께 한다. 하루 네 번 젊은 수좌들과 함께 정진한다. 큰방에서 정진하다가 노스님이 저 멀리서 오는 발걸음만 듣고도, 문 열고 들어오는 자취만 보고도, 공양하는 것만 보아도 감동과 환희심에 젖는다. 달리 말씀을 하지 않아도 당신 하시는 행 하나만으로 번뇌가 사라진다. 말씀이 필요 없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얼마나 오래 계실지 모른다. 그래서 하루 하루 아니 한 시간이 정말 아깝고 귀하다. 노스님께서는 견성(見性)을 못했다며 겸손해 하시는데 우리 눈에는 생불(生佛)이시다.” 

혜해스님 분향소는 경주 흥륜사 금당선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진행된다. 영결식은 6월2일 경주 흥륜사에서 거행된다. 이날 영결식은 명종 5타, 개회, 삼귀의, 반야심경, 영결법요, 헌다 헌향, 행장소개, 추모입정, 영결사, 법어, 추모사, 조사, 조가, 헌화, 인사말, 사홍서원, 발인, 다비 등의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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