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한류 유행하지 않았던 적 없었다”

“만약 일본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할 때 당신이
하나만 들고 갈 수 있다면
무엇을 잡겠는가?”

“백제관음상”
‘인간의 조건’ 저자 앙드레 말로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놓고 사회각층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왜색문화가 한국을 집어삼키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결과를 얻고 보니 정반대였다. 한국에서의 일본문화 열풍은 미미했고 일본에서는 거대한 한류(韓流)의 확산현상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이때부터 친한파(親韓派)들이 대거 양산되기 시작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한·일간에 문화교류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다. 

한국의 문화예술계는 일본에서의 한류가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갖고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광폭행보를 내딛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한국문화예술의 세계성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에서 한류가 유행하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보관 중인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떠올려 보면 일본열도 전체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의 별관과 같다고 하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카가미 신사(鏡神社)에 보관된 세계최대 규모의 고려불화 수월관음도(419.5×252.2cm)의 일부분. 시공사 ‘고려시대의 불화’
일본에 보관 중인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떠올려 보면 일본열도 전체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의 별관과 같다고 하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카가미 신사(鏡神社)에 보관된 세계최대 규모의 고려불화 수월관음도(419.5×252.2cm)의 일부분. 시공사 ‘고려시대의 불화’

호류지의 ‘백제 관음’ 

동국대 불교학부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중앙도서관의 다무라(田村) 문고에서 불교미술 관련 책들을 찾아보다가 문득 <백제관음>이라는 도록(圖錄)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펼쳐서 볼 수 있는 백제관음상의 긴 브로마이드 사진이 있었고 그것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7세기 백제시대의 목불(木佛)이 일본에 이렇게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니!

더군다나 이 목조관음보살입상은 높이가 209cm나 되는 엄청난 대작이었고 참으로 아름다운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창시절 백제역사를 배우면서 왜 이 불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들어보지 못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백제관음이 모셔진 곳은 고구려의 담징(曇徵)스님이 그린 금당벽화(1949년 화재로 소실)로 유명한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이다. 일본인 중에는 백제관음을 보겠다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일부러 이 지역을 방문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소설 <인간의 조건>의 저자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약 일본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할 때 당신이 하나만 들고 갈 수 있다면 무엇을 잡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주저 없이 “백제관음상”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세계적인 예술평론가가 일본최고의 예술품으로 백제관음을 지목하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백제인의 영혼이 담긴 깊은 미소를 그의 심미안이 대서특필해 낸 것이다. 

현재 일본인들은 백제관음이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억지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호류지의 고문서와 각종 연구를 보면 백제가 보낸 불상임이 명백한데도 말이다. 
 

센소지(淺草寺)에 소장되어 있는 물방울 수월관음도. 시공사 ‘고려시대의 불화’
센소지(淺草寺)에 소장되어 있는 물방울 수월관음도. 시공사 ‘고려시대의 불화’

700년만에 귀국 ‘물방울 수월관음’ 

20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현존하는 최대크기의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419.5×252.2cm)가 전시되었을 때 뉴욕타임즈에서는 “모나리자에 필적한다(the equivalent of the Mona Risa)”는 극찬을 보냈다.

큐슈 사가(佐賀)현 카가미 신사(鏡神社)에 보관된 이 수월관음도는 1310년 고려 충선왕의 왕비인 숙비 김씨가 궁정화원 8명을 동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고려인의 신심과 발원이 응축된 걸작이다. 2009년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아쉽게도 이 거룩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인 2010년 10월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계 44곳에서 모은 61점의 고려불화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700년 만의 해후’라는 제목으로 열린 고려불화대전 특별전에 단걸음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때 나는 칸트가 말한 ‘숭고(Sublime)’와 벤야민이 말한 원작이 갖는 ‘아우라(Aura)’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법열(法悅)을 느꼈고, 고려불화를 한 점만 보아도 보살이 된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보일락 말락 하는 가는 붓에 한 올 한 올 흰색 안료로 정교하게 그려낸 시스루의 투명 너울은 그야말로 섬세하고 절묘했다.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천의(天衣), 그 은은한 색채와 고매한 분위기는 고려불화에서만 볼 수 있는 불심과 예술혼의 결정체였다. 

일명 ‘물방울 관음’이라 불리는 일본 센소지(淺草寺) 소장 수월관음도는 혜허(慧虛)스님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공개하지 않아 일본 학자들도 보기 어려웠던 작품이라고 한다. 관음보살이 바위에 앉아 있지 않고 입상형식으로 서 있으며 원형이 아닌 길쭉한 물방울모양의 신광(身光)의 광배를 하고 있어서 매우 독특한 양식이었다. 나도 모르게 ‘불화즉고려(佛畵卽高麗)’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불화가 고려 그 자체인 것이다. 

고려불화는 종교와 예술이 만나서 탄생시킨 향상처(向上處)이자 인간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처(窮極處)라 할 만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고려불화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 점의 작품도 소장하지 못했었다. 이후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구입과 수집을 통해 현재 국내에 20점 정도를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고려불화는 총 160여 점이 현존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80%는 일본이 소장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에 10여 점이 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일본으로부터 구매와 기증을 통해 고려불화를 수집해온 미국의 미술관들은 고려불화를 중국이나 일본의 미술품으로 알고 있었다. 고려불화 연구 50년 만에 비로소 국적을 한국으로 재지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호류지(法隆寺)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관음. 국사편찬위원회
호류지(法隆寺)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관음. 국사편찬위원회

➲ ‘결론적 미학’의 한국불교
    ‘유지·보존’ 실천 일본불교

고려인만 그릴 수 있었던 고려불화! 그 독보적인 미(美)의 세계는 불교미학의 정점이자 한국예술의 최고봉이다. 고려불화는 이제 한국불교미술의 백미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교넨(凝然, 1240~1321)은 <삼국불법전통연기>라는 책에서 인도,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상호영향으로 일본불교가 성립되었다는 ‘삼국불교사관’을 제시하며 한국을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 한국불교의 역할을 무시한 ‘한국사상 부재론’은 일제시대의 식민사관 정립의 기초가 됐다. 

이러한 허황된 ‘삼국불교론’을 비판한 효당 조명기는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에서 일본불교의 특성을 “한국불교와 중국불교를 현상 그대로 보존하고 철저히 실천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즉 한국불교가 완성해 놓은 불교를 일본은 철저히 유지하고 보존해 온 역사라는 것이다. 

일본은 흔히 자신들이 아시아의 문화종착지임을 내세우면서 ‘종착지 문화론’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종착지 문화라는 것도 결국은 한국에서 물려받은 문화를 전수받아 잘 유지하고 보존해온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인도가 서론을 시작하고 중국이 각론을 펼쳐서 한국이 결론을 맺으면’(육당 최남선의 논법), ‘일본은 이를 잘 유지하고 보존해 왔던 것’(효당 조명기의 논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나는 한국이 미학(美學)의 차원에서도 ‘결론적 미학’을 선보이고 있다고 확신한다. 석굴사원을 보더라도 인도의 아잔타와 에롤라 석굴이 중국의 돈황과 운강 석굴을 거쳐 한국의 석굴암에 이르면 석굴미학의 결론을 완성하게 된다. 고려청자가 보여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미학(陶瓷美學)이 그러하고, 오·탈자 하나 남기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해인사 고려대장경이 그러하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왜구의 노략질,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친 약탈과 무단반출, 경매와 기증 등을 통해 이루어진 고려불화의 일본 반출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일본에 보관 중인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떠올려 보면 일본열도 전체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의 별관과 같음을 실감하게 된다. 일본으로 들어간 우리의 불교문화재는 일본인의 불심(佛心)과 미감(美感)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었고 그들은 이를 목숨과도 같이 소중히 보존해 왔다. 

우리들보다 한국문화재를 더욱 사랑한 나라 일본! 윤달에 맞이하게 된 부처님오신날에 일본에서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불상과 고려불화를 떠올려 본다. 

[불교신문3586호/2020년5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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