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4년 부처님오신날 특집’
특별기고 /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뜻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
땅 떠나서 일어나려는 것 옳지 못하다”
‘권수정혜결사문’에 담긴 보조스님 뜻은
중생 맞닥뜨리는 현실 외면 말라는 것

출가자가 ‘중생의 현실’을 놓지 않아야
붓다의 가르침 현실에 오롯이 서 있어

석길암
석길암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이 말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보조스님의 <권수정혜결사문>에 보이는 이 말은 불교인을 넘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꽤 널리 회자되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보조스님은 이 구절을 이통현의 <신화엄경론>에서 차용했다고 짐작된다. 같은 구절이 여러 선사들의 어록에도 보인다. 그런데 대부분은, 오늘의 우리가 그러듯이, 저 한 구절만 운운하고 만다. 그런데 사실 보조스님에게는 이어지는 한 구절이 더 있다.

“땅을 떠나서 일어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離地求起 無有是處也).”

읽기 나름이고, 앞 구절을 단순히 되새기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필자는 이 뒤의 구절에 다다르면 늘 마음이 숙연해진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태도,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조스님의 절절한 마음이 새삼 와 닿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렇게 추임새를 넣어본다.

‘땅을 떠나서는 일어설 수 없다. 땅을 떠나서는, 일어선다고 해도 그것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것이 보조스님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보조스님에게 땅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당시의 고려 불교계가 당면하고 있던 현실이었을 것이다. 혹은 좀 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중생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땅을 떠난다는 것은 중생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중생이 맞닥뜨린 현실을 외면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읽을 수 있는 구절이다.

그래서 보조스님은 굳이 이전의 구절에 “땅을 떠나서 일어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離地求起 無有是處也)”는 한 구절을 새롭게 덧붙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앞 구절이 당위의 전제라면, 뒤의 구절은 그 당위의 전제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정혜결사의 방향성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불교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결사들 중에 붓다의 가르침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전제로 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이 가지는 근본정신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하는 고민과 탐색이 쌓이고 쌓여서,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구체화하여 실천해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결사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보조스님이 정혜결사의 지향을 천명한 저 한 구절에는 ‘중생의 현실’에 대한 보조스님의 절절한 고민이 있었고, 출가자가 그 ‘중생의 현실’을 놓지 않아야만 붓다의 가르침이 현실 속에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불기 2564년의 부처님 오신 날을 바로 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어 기뻐하기에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삶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져다 준 풍경이다. 1월을 기점으로 시작된 코로나19 사태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갑갑하고 힘든 현실이 벌써 3개월째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대열에 불교계 역시 적극 동참하여 대응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거의 두 달에 가까운 산문폐쇄가 이어졌고, 부처님 오신 날을 앞에 두고서 봉축을 위해 준비했던 다양한 행사들은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 사찰의 다양한 불사보다는 우리 공동체의 건강과 안전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불교계 전반에 공유된 결과이기도 하다.

아마도 한 동안은 사찰의 살림살이도 그리고 불자들의 살림살이도 어려울 것이다. 온 나라 온 국민이 다 어려울 때이니 불교계만 괜찮기를 바라는 것도 염치없는 생각일 것이다. 코로나19가 사회의 어느 한 부분만 공격한 것은 아닌 까닭이다. 사회 전반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고, 그 힘든 강도를 낮추어보기 위해 각계각층이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불교계의 대응 역시 그러한 사회현실의 중생이 부닥친 현실에 적극 발맞추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힘들지만, 그래도 더 힘겹게 이 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코로나19의 전면에서 휴식도 제대로 못하면서 맞서고 있는 의료인들이 그렇고, 지역을 가리지 않고 재난대응의 손발이 되어야 하는 119 구조대원들이며 일선 공무원들이 그렇다. 다양한 직군과 계층에서 재난사태에 대한 대응과 극복에 몰두하느라 일손이 바쁘다. 그나마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대응은 성공적이어서 확산세가 주춤하고, 대응의 일선에 있는 이들은 다행스럽게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19가 이대로 수그러들어서 모두에게 ‘일상(日常)’이라는 선물이 주어지기를 잠시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 일상사에 우리 부처님도 벼락처럼 선물로 항상 머물러 주셔서, 우리의 삶을 한숨이 아니라 기쁨으로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에게 행복한 ‘일상’은 어떻게 다가오고, 벼락처럼 선물처럼 와서 우리 옆에 상주하는 부처님을 기대하는 것은 그냥 바람에 그쳐야만 하는 것인지.
 

보조스님이 생각한 ‘부처님처럼’이 의미하는 것은 ‘고통 받고 있는 중생과 그 중생의 현실을 떠나지 않은 부처님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중생이 맞닥뜨린 현실을 외면하여서는 안 된다. 사진은 코로나19로 헌혈자가 급감하면서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자비의 헌혈에 동참한 광주불교환경연대 스님과 회원들. 불교신문 자료사진
보조스님이 생각한 ‘부처님처럼’이 의미하는 것은 ‘고통 받고 있는 중생과 그 중생의 현실을 떠나지 않은 부처님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중생이 맞닥뜨린 현실을 외면하여서는 안 된다. 사진은 코로나19로 헌혈자가 급감하면서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자비의 헌혈에 동참한 광주불교환경연대 스님과 회원들. ⓒ불교신문

2564번째의 부처님 오신 날은 여러모로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겨울 동안거 기간에는 ‘상월선원 동안거 천막결사’라는 대한민국 불교의 중흥을 향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모색이 시도되었다. 한국불교는 조선시대 이래 지금까지 약 500년 동안을 중생의 바로 옆이 아닌 산중 중심의 불교로 존재해야 했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이 남긴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외형을 벗어던지고, ‘부처님처럼, 중생이 있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불교’로 환골탈태하겠다는 의지가 결사를 통해 표명되었다.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우리 스님들도 부처님처럼 중생 옆에서 중생의 삶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아파해야 한다는 아홉 분 스님들의 의지에 동참했다. 그 아홉 분 스님들이 해제 후에 첫 번째로 보여준 행보가 바로 헌혈이었다.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불교, 세상과 함께 하는 불교를 향한 원력의 첫 행보는 상징적이었다.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사회대중의 삶에 동참하는 첫 걸음이기도 했다.

보조스님의 ‘땅을 떠나서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선언에서, 그리고 상월선원 아홉 스님의 첫 행보에서, 붓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성취하고 중생을 향한 교화에 첫걸음을 내딛는 부처님의 행로가 떠오른다. 부처님이 시끄러운 곳에 있는 중생이라고 외면했던가? 부처님이 가난하고 천한 중생이라고 해서 외면했던 적이 있는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이라면, 부처님은 그들을 만나는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고통을 여의는 길의 등불이 되었다.

보조스님이 말한 ‘땅’은 ‘고통 받고 있는 현실과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이다. 그렇게 읽으면, 보조스님이 생각한 ‘부처님처럼’이 의미하는 것은 ‘고통 받고 있는 중생과 그 중생의 현실을 떠나지 않은 부처님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는 그 순간에조차 한 명 한 명의 근심을 듣고, 그 근심에서 헤어나는 길을 가르치는 일상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신 분임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올해 우리 맞닥뜨리고 있는 이 재난은 우리 사회에 많은 고통을 강요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도 제공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자 각자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날이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코로나19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소외받고 힘든 계층들은 그 와중에도 여전히 더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다행히 코로나19 사태가 수그러드는 상황이지만, 모두가 겪고 있는 현실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 소외받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은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 잊어버리는 한 낱 한 낱의 중생에게도 관심을 놓지 않고서야, 그제서야 우리 불교도들은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외면 받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중생이 한 분 한 분의 부처님으로 소중하게 보살펴지는 세상, 거기에 다다라서야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564번째 부처님오신날을 맞으면서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다. 중생이 없다면 부처도 없다. 중생에 대한 동체대비심이 바로 부처님이다.”

혹여 우리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끝내 놓지 않으셨던 중생은 정작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불교신문3586호/2020년5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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