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시간은 밀도부터 달라
깊어진만큼 마음의 나이 먹어

혜인스님
혜인스님

수행은 마음으로 나이 먹는 일이다. 새벽에 눈 떠 어둑한 하늘을 홀로 바라보는 일이며, 아무도 없는 마당을 사뿐히 거니는 일이며, 그 고요한 즐거움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슬픈 일엔 금방 눈물 차오르는 일이며, 괴로운 일에 쉽게 마음 아파하는 일이며, 아픔을 꼭 안아주되 내 아픔을 안아달라고는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일이다.

남들이 하는 내 얘기는 듣고도 모른 척하는 일이고, 부끄러운 만큼 사는 일이며, 깊어지는 사랑을 굳이 말로 안 해도 괜찮은 일이다.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일,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 일, 그렇게 내 나이를 까먹는 일이다.

도량석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가끔 다른 세상 속에 있는 기분이 든다. 법당에선 종도 쳐지고 초와 향도 켜지고 하나둘 사람들도 채워지는데, 그 잠깐 사이의 어수선함이 마치 다른 세상처럼 느껴져, 아무도 없는 마당에서 홀로 경행을 하거나 가만히 먼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저 하늘은 몇 살일까. 산은 몇 살일까. 산 위의 달은, 저 별을 몇 살일까.

4년의 강원 생활을 졸업하며 도반에게 걱정을 털어놨던 일. ‘이제 승복에 띠 떼면 누가 봐도 겉으로는 프로가 되는 건데, 속으로는 아직 어리고 부족한 아마추어 같다’고. ‘그동안 볼꼴 못 볼꼴, 깨끗한 꼴 더러운 꼴, 추한 꼴 아름다운 꼴 다 보고 살았으면서 무슨 걱정이냐’고 도반은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학벌도 출신도 나이도 다른 사람들끼리 그렇게 지지고 볶고 산 1년이 밖에선 한 10년쯤 된다고. 그러니 난 이제 칠팝십쯤 먹은 거라고.

그렇게 따지면 석가모니 붓다는 삼 아승기겁(阿僧祇劫) 살이다. 붓다가 되시는데 걸린 그만큼의 세월을 숙명통(宿命通)으로 다 기억하고 계실 테니, 몸으로만 30대에 성불하고 80대에 돌아가셨지, 마음으로는 삼 아승기겁 살이다. 그러니 나이 많은 제자들에게도, 수천만 년의 수명을 가진 천신들에게도 스승노릇 하실 수 있었던 걸 거다.

수행의 시간은 이렇게 물리적 시간과 다른 밀도로 흘러간다. 그 밀도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느냐가 수행의 힘이자 마음의 깊이요, 깊어진 만큼 마음은 나이를 먹는 거겠지. 우리나라 승려들이 ‘빌어먹는 자’라는 뜻의 비구 비구니가 아니라 스승이라는 뜻의 ‘스님’이라 불리는 것도 아마 그만큼 깊은 힘으로 밀도 있는 세월을 살아왔다는 뜻이겠지.

나도 처음엔 볼꼴 못 볼꼴 보면서 참 놀라고 당황스럽기도, 화가 나기도 했었다. 이젠 스님 행색을 했다는 이유로, 남에게 쉬이 털어놓지 못할 별의별 얘기를 다 듣게 되지만, 별로 안 놀랍고 안 당황스러운 건 그만큼 마음으로 나이 먹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땐 감당하기 힘들었던 엄청난 일들이 세월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추억이 되는 것처럼.

하늘의 별과 달이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았겠지만, 그들이 우리의 스승 노릇을 할 수 없는 건 물리적으로만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거다. 그럼에도 그들을 내 고요한 새벽을 함께 해주는 벗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또 수행자가 마음으로 그만큼의 세월을 살았다는 뜻일 거다. 마음으로 세월을 사신 부처님은 그래서 새벽별이 살아온 수억 광년의 세월이 건네는 진리를 통할 수 있었던 걸 거다.

그래서 마음나이에는 숫자가 없는가 보다. 아승기니 겁이니 하는 말들도 숫자로 셀 수 없는 세월이란 뜻일 뿐. 그래서 수행자의 얼굴에선 쉽게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는가 보다. 가늠할 수가 없어서 부처님은 세월을 ‘무시이래(無始以來)’라 하셨나 보다. 세월을 사는 우리는 그러니 다 무시이래의 친구다. 그렇게 세월을 사는 마음이 곧 수행이다.

[불교신문3584호/2020년5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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