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가지 재앙 소멸되고 백가지 福 일어난다”

2017년 윤달에 서울 반야사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올린 가사 장삼 공승제. Ⓒ불교신문
2017년 윤달에 서울 반야사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올린 가사 장삼 공승제. Ⓒ불교신문

“훌륭하도다, 해탈복이여! 위없는 복전의(福田衣)로다. 내 지금 이를 받들어 지녔으니 세세생생 가피를 얻을지라.”

스님들이 가사를 수할 때 두 손으로 받든 채 읊는 정대게(頂戴偈)이다. 가사(袈裟)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법복이요, 위대한 용맹심의 징표이기에 이를 착용하는 출가자의 공덕이 참으로 수승함을 말해주는 게송이다. 그렇다면 재가자가 올리는 가사공양의 의미는 얼마나 클 것인가. <불설가사공덕경>에 “가사불사를 발원하는 이는 천가지 재앙이 눈 녹듯 소멸되고, 조성에 동참한 이는 백가지 복이 구름일 듯 일어난다”고 했다.

가사불사는 삼보의 한 존재인 승보를 보호하고 불교를 꽃피워나가는 일이기에, 모든 불운을 물리치고 행복을 불러들일 만큼 크나큰 공덕이라는 것이다. 가사불사는 삼보를 향한 일상의 보시이지만 특히 윤달의 불교의례로 전승되어왔다. 윤달을 ‘수행과 보시’의 종교적 시간으로 정착시켜온 불교전통 속에서, 승가에 올리는 가사공양의 의미를 새기며 부처님오신날을 맞는다면 그 환희로움이 더욱 클 법하다. 

출가자의 정신 담은 옷

스님을 나타내는 말 가운데 방포원정(方袍圓頂)이라는 표현이 있다. ‘방포’는 가로로 긴 장방형의 가사를 말하고 ‘원정’은 삭발한 둥근 머리를 가리키니, 가사와 삭발은 용맹 발심한 출가 수행자의 의지를 복식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출가자가 지니는 최소의 소유물 또한 가사와 발우이기에, 스승의 법이 제자에게 이어짐을 ‘의발(衣鉢)을 잇는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가사는 출가자를 상징하는 옷으로, 최초의 가사를 입은 이는 당연히 부처님이다. 태자 싯다르타는 출가를 결심하고 카필라성을 나선 뒤 처음으로 만난 사냥꾼과 옷을 바꾸어 입었다. 화려한 황금장식의 옷을 입고 있던 싯다르타는 올이 굵고 해진 옷을 입은 사냥꾼을 만났을 때 마음속으로 외쳤다. “저 옷이야말로 진인(眞人)의 옷이요, 세상을 건지는 자비의 옷이다!” 출가한 부처님이 수행자의 정신과 의지가 깃든 옷으로 여겨 갈아입었으니, 이는 바로 가사의 시초인 셈이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재가자가 버린 옷이나 죽은 이를 감싸던 천 등을 기워서 입었다. 낡고 더러운 옷을 빨아 지은 옷이라 하여 분소의(糞掃衣)라 불렀으니 가사는 그야말로 무소유와 청빈함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초기에는 쓰레기더미에서 옷을 구했으나, 점차 승단이 커지면서 재가자의 보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고대 인도에는 96종의 외도가 있어 외관상 이들과 불제자를 구분하기 힘들었기에, 이에 따른 폐단을 없애고 출가정신을 지키기 위해 가사를 만들 때 엄정한 규범을 두었다. 

기본전제는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는 옷’을 만드는 데 두면서, 사문의 옷은 세 종류의 천함을 지녀야 한다는 ‘사문의삼종천(沙門衣三種賤)’을 실천케 했다. 이는 아름답지 않고 탁한 색깔을 쓰는 색천(色賤), 옷감을 조각으로 나누어 만드는 도천(刀賤), 낡고 쓸모없는 옷을 입는 체천(體賤)을 말한다.

특히 외도와 구분하기 위해 가사를 논밭 모양의 조각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할절의(割截衣)라 부른다. 어느 날 부처님이 가지런한 전답을 보고 “이는 세간의 복전(福田)이니 출세간의 복전인 승가의 옷도 이처럼 만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방식이다. 

제자들은 이때부터 보시를 받은 옷감이나 주은 옷이 있을 때 열 명이 있으면 열 조각, 백 명이 있으면 백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직접 옷을 지어 입었다. 이렇게 하면 평등하게 나눌 수 있을 뿐더러, 한 조각도 남김없이 사용할 수 있다. 긴 장방형으로 만드니 조각 천을 계속 이어붙임으로써 가사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가자들의 가사보시는 옷감으로 받았고, 승가에 의재(衣財)를 받는 수납비구, 옷감의 저장과 관리를 맡는 수장(收藏)·수고(守庫) 비구, 옷감을 분배하는 분의(分衣) 비구 등을 두었다. 

가사는 점차 용도에 따라 삼의(三衣)로 분화되어 중요한 의식이나 탁발·외출에는 승가리를 입고, 예불·포살 등의 승가행사에는 울다라승, 평시에는 안타회라는 가사를 입었다. 지금도 남방불교에서는 가사가 곧 일상복이지만, 중국·한국·일본 등 북방의 추운지역에서는 장삼 위에 가사를 착용하면서 의식용 법복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사를 수한 스님들(범어사).
가사를 수한 스님들(범어사).

역사 속의 가사불사 

가사불사는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음식, 가사, 약, 침구는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올리는 사사공양(四事供養)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살아가는 데 기본적인 의식주이기에, 승보에게 올리는 가장 소중한 공양으로 삼아온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옷이자 출가자의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으로, 가사불사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들어온 초기부터 스님의 가사를 지어드리는 불사가 왕실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공덕으로 다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가사시주가 일상화되어 있어, 1356년에 공민왕 부부가 봉은사에서 보우스님의 설법을 청해 듣고 은발우와 수놓은 가사를 시주한 내용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 와서도 가사불사는 이어졌다. 태종은 1408년 빈전에서 화엄삼매참(華嚴三昧懺) 법회를 열고 108명의 스님에게 가사와 발우를 시주하였다. 문종은 즉위하던 해(1450년)에 채백과 나견을 사찰에 시주해 가사와 좌구 불사에 사용토록 했고, 세종의 대상(大祥) 때는 5일간의 법회와 함께 스님 8백 명에게 발우와 능라단, 황색 명주, 가사를 차등 있게 시주하였다. 이 외에도 전국의 큰 사찰마다 가사불사가 행해지면서 이에 대한 불자들의 시주가 있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렇다면 특히 윤달에 가사불사를 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추론해보면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른 시기부터 윤달에 불사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는 윤달이 들면 왕실에서 백좌도량을 열거나 대장경을 경찬하고 왕이 사찰에 행차해 불공을 올렸는데, 이는 모두 윤달이라는 비일상적이고 조심스러운 시간을 종교적으로 맞으며 공덕을 쌓기 위함이다. 

둘째, 윤달에 수의를 짓는 민간의 풍습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의는 죽음을 대비한 옷이지만, ‘수의를 미리 만들어놓으면 장수한다’는 담론과 함께 경사스런 분위기 속에서 지었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이처럼 윤달에 부모를 위해 잔치처럼 옷을 만드는 풍습이, 스님을 위해 옷을 만드는 가사불사에 영향을 미쳐 윤달에 집중적으로 ‘옷 만들기’가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짐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달이면 대규모 가사불사를 벌여, 전문기량을 지닌 도편수스님의 지휘로 양공스님과 신도들이 정성껏 손바느질로 만드는 것이 승가에 내려오는 전통풍습이었다. 한 벌의 가사가 완성되기까지 시주를 하는 이, 바느질을 하는 이, 시주를 받는 이가 모두 청정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임하는 가사불사이기에 그만큼 공덕 또한 크고 깊을 것이다. 
 

2014년 윤 9월에 거행한 통도사 가사불사 장면.
2014년 윤 9월에 거행한 통도사 가사불사 장면.

복전의(福田衣)의 공덕

“고귀한 가사를 올려 불법을 외호하는 참 불자로 살아가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이 옷을 입고 열심히 정진하셔서 중생의 업을 맑혀 주시옵소서.” 곱게 싼 가사를 두 손으로 받들어 스님께 올리는 불자들, 그리고 이를 받는 스님들의 모습이 더없이 경건하다. 그만큼 가사에 담긴 의미가 엄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달이 든 해마다 통도사에서는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가사를 올리는 오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통도사는 부처님과 자장율사의 친착가사(親着袈裟)를 모시고 있어, 윤달이면 부처님과 조사의 법을 가사에 담아 전국의 대덕 스님들께 보시를 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가사불사에 동참하여 무량한 공덕을 짓는 기회로 삼고 있다. 

2014년 윤9월의 가사불사도 여느 윤달과 마찬가지로 입재에서 회향까지 40~50일간을 두었다. 이는 실제 사중에서 가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영산전에 가사당(袈裟堂)을 설치해 임시편액을 걸고, 발을 쳐서 결계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한 공간, 팔상도의 부처님일대기가 펼쳐진 영산전에서 가사를 만드는 상징성 또한 크고도 깊다. 이곳에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세의 제자들이 소임을 쓴 방을 붙여놓고 도편수 스님의 지도 아래 정성과 공경을 다해 가사를 짓는 것이다. 

수십 일간에 걸쳐 가사를 짓고 나서, 가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장스님의 점안의식으로 상서로운 법복이 완성되었다. 동참대중들은 저마다 머리에 가사를 이고 적멸보궁을 돌며 새 가사를 수할 스님들의 가없는 수행정진을 발원하였다. 이윽고 회향의식에서 불자들이 여러 대덕스님들께 가사를 올리고, 새 가사를 수한 스님들은 사부대중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아울러 조계종 가사원에서 제작한 500여 벌의 가사가 전국의 대덕스님들께 회향됐다. 

2017년의 윤달부터는 영산전에서 설법전까지 가사를 이운하는 의식으로 회향이 시작되었다. 이운의식에서는 향과 번과 연(輦)을 선두로 하여 스님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그 뒤로 가사를 두 손으로 높이 받는 불자들이 따랐다. 행렬이 지나가는 길마다 꽃잎을 뿌리니 산화장엄(散華莊嚴)의 환희로움이 불국토와 다를 바 없다. 

통도사 일주문 돌기둥에는 ‘방포원정 상요청규(方袍圓頂 常要淸規)’라 새겨져 있다. “가사 입고 삭발했으니 늘 바른 규율을 따라야 하리”라는 글귀처럼, 출가사문에게 가사는 세세생행 가피가 따르는 복전의이자, 계율의 상징임을 새겨보게 한다. 
 

가사를 짓는 모습. Ⓒdlpul1010
가사를 짓는 모습. Ⓒdlpul1010

[불교신문3584호/2020년5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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